윤봉길의사의 의거

2023. 5. 7. 06: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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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출가 생불환(나이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
1930년 3월 6일. 가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난 사람은 윤봉길이었습니다.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 그리고 의거 2일 전에 그는 김구에게 자서이력서를 보여주면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럼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은 어땠을까. 1931년 5월 8일에 상해에 도착했을 때 임시정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생긴 임시정부는 교민들에게 그저 교민단 정도로 인식되었고 임시정부는 월세도 내지 못하고 봉급도 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지방색과 투쟁노선 그리고 이념 싸움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 단체를 떠나기도 했고 김구하고 몇 사람만이 남았으니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습니다. 윤봉길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상황에 실망감을 느끼고 미국에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럼 어쩌다가 윤봉길은 김구과 동행하게 되었을까. 혹시 김구는 자신의 하수인으로 윤봉길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사실 이들 관계는 동반자에 가까웠습니다. 먼저 거사를 밝힌 것은 윤봉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김구는 폭탄을 마련해주고 배후에서 도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 관계가 처음부터 거사를 도모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윤봉길은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당시 자신이 근무하던 중국종품공사에 김구가 들렀고 그 곳에서 한인공장직원들과 김구가 시국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윤봉길은 임시정부에 대해 실망하고 있던 터라 김구에 대해 특별한 교분을 쌓지 않았고 김구 입장에서도 윤봉길은 보통 애국지사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봉창에게 폭탄을 마련해준 사람이 김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러면서 김구와 윤봉길의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적성(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1932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김구선생과 윤봉길


4월27일(시간 미상)에 전기한 조선인 집에서 윤봉길은 양복 차림의 독사진 한 장,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후로 한 사진 한 장, 또 김구가 뒤에 서 있는 사진 한 장을 각각 촬영했습니다. 그때 김구가 이 폭탄은 이봉창이 소지하고 간 것과 동일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후 김구는 윤봉길을 무궤도 전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했으나 폭탄의 구입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윤봉길은 즉시 공동조계인 오송로(吳淞路)의 일본인 상점에 가서 보자기 한 장을 구입하고 숙소로 돌아왔다가 동방공우로 옮겼습니다. 오후 7시 반경 김구가 내방하여 시라카와 대장 및 우에다 중장을 어제 제시한 폭탄으로 살해할 것, 투척할 때 끈을 잡아당기면 소리가 난 후 4초 안에 폭발한다는 것, 사용할 폭탄은 29일 아침에 직접 건네줄 뜻을 전하고 다음날인 28일에 중국 YMCA 청년회관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윤 의사는 27일 오후 1시께 훙커우공원 열병식장을 사전 답사하고 숙소인 동방공우 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김구 선생이 찾아와 “최후를 앞두고 경력과 감상 등을 써달라”고 하자 평소 갖고 다니던 중국제 소형 수첩에다 ‘이력’과 유촉시(遺囑詩) 4편을 써서 김구 선생에게 건넸습니다. 
‘처처(??)한 방초(芳草)여 /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 청청(靑靑)한 방초여 /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가오 / 다정한 방초여 / 금년 4월29일에 / 放砲一聲으로 명세하세’
“강보에 싸인 두 兵丁에게 - 두 아들 模淳과 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중략…)” -거사 이틀 전, 두 아들 모순(맏아들 淙의 어릴 적 이름)과 담에게 쓴 유서(유촉시)중 일부-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거사 당일이 되었습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김구의 나이는 57세, 불과 24세였던 윤봉길과 이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만 하였습니다. 
“새벽에 윤군과 같이 김해산 집에 가서 최후로 식탁을 같이 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기색을 살펴보았다. 태연자약하다… 윤군의 밥을 먹는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다. 김해산군은 윤군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나에게 조용히 이러한 권고를 한다. ‘선생님, 지금 상해에서 우리의 활동이 있어야 민족적 체면을 보전하게 되는 이때에 윤군을 구태여 다른 곳에 파송하려 하십니까?’ 나는 두루뭉수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모험사업은 실행자에게 전부 맡기는 것 인즉, 윤군 마음대로 어디서나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나 봅시다.’” 『백범일지』

中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직후 두번째 호외 동아일보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당일 두 번째로 낸 호외. 의거의 주인공이 조선인으로 판명됐고, 이름은 윤봉길, 나이는 25세라는 것을 강조하며 머리기사 제목으로 달았다. 아래 사진은 윤봉길 의사 순국 당시 모습.


그리고 아치 7시, 윤봉길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회중시계를 꺼내어 백범에게 건넸습니다. ‘제 시계는 6원짜리고 선생님 것은 2원짜리니 바꿉시다. 앞으로 한 시간 뒷면 제 시계는 쓸모 없으니까요.’ 1932년 4월 29일 상하우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 축하 연회는 가랑비가 내리는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윤봉길은 축하객으로 위장하여 군중들 틈 사이에 있었습니다. 군사훈련도 채 받지 못한 윤봉길,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였습니다. 기념식 순서를 지켜보던 오전 11시 40분, 윤봉길은 어깨에 걸고 있던 물통 폭탄을 꺼내 던졌습니다. 공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폭탄을 던진 직후 윤봉길은 준비했던 도시락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 일본헌병에게 붙잡힌 윤봉길은 사정없이 구타당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해 파견군사령관, 가와바다 사다쓰구 상해 거류민단장이 즉사했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 일본 수뇌부 7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잡힌 윤봉길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배후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구가 중국신문에 「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의 진실」이라는 글을 중국 신문에 기고하면서 이봉창과 윤봉길이 벌인 거사에 자신과 한인애국단이 주도했다고 밝히며 동시에 윤봉길 의사와 찍은 사진도 공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국민당 장제스 주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해내니 장하다.’고 격찬하였습니다. 하지만 윤봉길은 현장에서 붙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해 11월 일본 오사카 형무소로 이송돼 약 한달 간 독방생활을 한 뒤 가나자와로 다시 옮겨져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한편 일본이 작성한 문서 ‘상해 천장절 폭탄흉변사건’에서는 홍구공원을 '전장', '전쟁터'라고 표기했고 ‘전쟁터인 홍구공원에서 적국 특공대원이 일본군 수뇌를 살해할 목적으로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의거는 테러가 아닌 광복전쟁이었으며 따라서 일본도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공무상 죽은 게 아니라 전투지휘 중 사망한 것으로 봐서 전사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단 하나의 물병폭탄으로 적의 수뇌부를 사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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