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락호 김용환의 비밀

2023. 5. 6. 08:2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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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한 남자, 그는 술과 노름으로 돈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1995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바로 파락호였습니다. 파락호란 무엇일까. 파락호란 깨뜨릴 파(破), 떨어질 락(落), 지게 호(戶), 그러니까 몰락한 집안, 그러한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가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방탕하게 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는 집안에서 가문을 망하게 한다며 손가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알린 사람은 바로 김용환, 그는 조선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파락호였습니다.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처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윤학준은 『양반 동네 소동기』에서 우리나라 근대 3대 파락호를 꼽았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 형평사 운동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김용환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방법이 없던 김용환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을 때 당시 그의 딸은 김후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는 팔순의 치매노인이어서 더욱 그랬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그에게 아버지는 때 혼수로 장롱 사갈 돈마저 노름으로 날려 가슴을 숯검댕이로 만들었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속사정을 알고 나서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을 지우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김용환은 누구인가. 
김용환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그의 학맥을 잇는 중책을 맡은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입니다. 또 그는 애민 애국의 정신으로 존경을 받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기도 했으며 그의 부인은 향산 이만도의 손녀 이호였습니다. 그는 김참봉으로 불렸는데요. 종손으로 집안을 지켰고 할아버지의 공을 인정받아 참봉이라는 종 9품 벼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래서 난봉꾼으로 불렸을 때도 김참봉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1896년 의병활동을 하는 김회락이라는 사람이 학봉 종택에 은신해 있었습니다. 이 때 일본군이 찾아와 김흥락을 잡고자 했고 여기서 그의 사촌이자 김용환의 할아버지인 김흥락을 포박하였습니다. 김회락 의병 포대장은 안방 다락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일경은 그걸 빌미로 김흥락을 결박하고 마당에 꿇어앉혔습니다. 가재도구를 내동댕이치고 귀중품을 빼앗았습니다. 손자는 치욕스런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평소 선생으로 존경받아 임금 이외에는 위대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 할아버지였을 텐데 열 살 소년은 일경을 따라다니며 울면서 “우리 할배 살려주이소”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김용환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초 조선에 위기가 찾아오자 남모르게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1907년 군대가 해산하고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퍼져나간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참가했고 1911년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석주 이상룡은 안동을 떠나 만주로 가면서 학교를 후원하고, 의병을 지원하는 일과 착취당하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김용환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거액의 자금을 댄 것이 바로 김용환이었습니다. 그는 대대로 내려오던 땅 13만 평을 팔아 보태고 300년을 내려오던 학봉 종가를 팔았습니다. 그러면 문중에서 이를 다시 사들이고 팔기를 3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이것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것은 일제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일로 인해 일본경찰에게 세 번이나 잡혀 고초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 세 번 중 첫 번째는 3.1운동 이후에 만주 망명길에 올랐는데 신의주에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결국 안동으로 돌아온 일이었습니다. 김용환은 1921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와 연결되어 독립운동단체 의용단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군자금 모금 및 친일 부호 및 매국노들에게 '사형선고장'을 발부/발송하고 자금 징발 활동을 벌였으나, 1922년, 결국 일본제국 경찰에 세 번째로 체포됩니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그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택한 것은 바로 파락호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였고 새벽녘이 되면 큰 판돈을 걸고 베팅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름판에서 돈을 몽땅 잃으면 ‘새벽 몽둥이’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건달들이 들이닥쳐 돈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사방 십 리 이내로는 학봉 종택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다는 정도로 막대했던, 현재 시가로 200억 원 상당의 재산과 전답을 도박으로 말아먹은 것도 바로 이 시기 벌어진 것, 그는 이렇게 노름으로 돈을 잃은 것처럼 위장하였고 그리고 이러한 돈을 고스란히 독립자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자금이 된 돈에는 전 재산과 더불어 외동딸의 결혼자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는 안동 명문가 집안의 자손으로 위에서 말한 그의 13대조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던 사람이었고 김용환의 할아버지 김흥락은 을미사변 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딸 김후웅이 시댁에서 지원받은 혼수비마저 탕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이 일로  외동딸의 원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59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병이 깊어졌습니다. 당시 독립투사 측근인 하중환이 문병을 와서 ‘병이 이렇게 깊은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 감으실 건가.’라고 하자 김용환은 ‘선비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자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라며 끝까지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16세에 시집가니/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아배’는 경북 북부지방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방언인데요.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가 대한민국 훈장을 추서 받는 그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하였습니다. 사실 독립운동사에 있어 경제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우당 이화영 일가는 현재 시가로 800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산 안희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자금책이었습니다. 그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초창기 주식회사인 백산상회를 세웠습니다. 겉으로는 해산물이나 농산물을 취급하는 회사였지만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중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고립,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 기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와이 동포들도 경제적으로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1900녀대 초 하와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초기에는 대개 현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며 군대막사같이 생긴 판잣집에서 살며 하루 10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은 피같은 돈들이 독립운동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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