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상처의 역사 일본군 위안부
2023. 4. 15. 16:0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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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이면 이어지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 횟수는 1000회를 넘기며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집회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우리가 기억해야할 지울 수 없는 상처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당했던 정신대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 정의기억연대 소속 할머니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일본군 ‘위안부’문제입니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으로 정신대, 군위안부, 혹은 종군위안부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여러 가지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한국사회에서는 정신대라는 말로 먼저 쓰였습니다. 이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의미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려고 강제로 끌고 간 한국인들 특히 여성들을 가리켜 정신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말 외에도 종군 위안부라는 말도 사용되었는데 이 말 또한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다닌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주로 쓰이던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국제 연합 등 국제 활동의 장에서는 공식적으로 ‘일본군 성노예제’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이 운영한 위안부는 국가가 주도해 성노예를 군인들에게 조직적으로 제공한 경우로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입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은 193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에 이어 상하이를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군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 사건이 잇달았고 이를 방지한다는 명목 하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본토에서 위안부를 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춘부로 일하는 여성을 데려왔지만 나중에는 부족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식민지의 여성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소녀들은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그리고 배급이 끊길 것이라는 협박에 이유도 모른 채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일본군은 강간 방지만을 위해서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아니었고 이를 통해 성병도 예방하고 군의 사기도 진작시키면서 군대를 이끌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는 병사들에게 위생적인 성매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여성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군 ‘위안부’는 중일전쟁 초기부터 있었고, 1941년에는 대소공격을 준비한 관동군 특별 연습과 관련하여 짧은 기간에 조선총독부의 지원 하에 조선인 여성 2000~3000명을 동원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외에도 1941년 12월 일본군이 동남아와 태평양지역을 침략한 이후 군'위안부' 배치를 위해 다수의 조선인 여성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성 동원에 필요한 돈은 일본정부에서 상당부분 조달하였으며 일본군과 조선총독부, 중국 괴뢰기관 사이에 군'위안부' 모집에 필요한 돈이 오간 사실이 자료로서 확인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여성에 대한 만행은 ‘군 위안부’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일본 등지 후방에는 기업 및 산업장에도 기업 '위안부'가 배치되었으며 '위안부'제 운영에는 일본군과 정부만이 아니라 일본기업도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1991년 8월, 일제 태평양침략전쟁기간 중 남양군도에 끌려가 4년여 동안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혹사당했던 종군위안부가 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일본의 만행을 역사 앞에 고발하기 위해 일본법정에 선 것입니다. 일제의 조선인 종군위안부동원은 中.日전쟁부터 본격화, 당시 12-40세미만의 미혼여성을 총동원대상으로 한 '여자挺身근로령'(1944년8월 공포시행)등을 통해 20여만명이 여자정신대 또는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동남아시아,남양군도등지의 戰場에 강제연행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중 상당수는 일본군의 학살, 병사등으로 희생되고 일부는 귀국했으나 그 때까지 이 종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힌 사람은 국내외를 통털어 4-5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한 과거 이러한 일을 겪었던 사람의 인터뷰는 이러했습니다.
"라바울에 도착, 수개월동안 일본군 야전병원에서 붕대세탁등 잡일을 하다가 어느날 2명의 조선여자들과 함께 현지 원주민들의 교회를 개조한 위안소로 끌려간뒤 4년동안 일본군의 성욕처리를 위한 도구로 쓰여졌다"면서 "패전이 임박하면서 일본군들이 도주한 뒤 해방된 지도 모르고 원주민들과 지내다 당시 남양군도의 각섬을 돌며 잔류자들을 귀국시키던 배를 타고 해방 이듬해 4월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은 대개 14세부터 30세까지로 강제 연행됐으며 40대의 부인까지도 끌려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 이들은 삼엄한 감시 속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심한 경우 하루 1백 명까지 일본군인을 상대했으며 군표를 댓가로 받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사용할 수도 없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숫자는 10만-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그러던 2003년 미정보기관(OSS)이 1945년 8월 한국 위안부 23명을 포함한 전쟁포로를 심문한 기록에는 ‘23명의 여성은 확실히 강압과 사기에 의해 일한 위안부였다’는 내용이 발견되었으며 명단에는 위안부 문제를 폭로했던 북한 박영심씨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어떠한 입장을 표하고 있을까.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사과한 바 있습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노 담화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군과 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으로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소는 당시 군(軍)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구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또 일본군'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 시위가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몇 번의 사과가 있었지만 이것에 상반되는 일본 정치인들의 언행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며 일본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고 그에 따른 계승과 노력의 실천이 나와야 하는데 그들의 행동에는 과연 사과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진정성의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14년 당시 아베 내각 때에는 강제 연행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정치권의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또한 아베 내각은 주변국들 반발과 여론 악화를 의식해 ‘고노 담화를 계승하되 검증한다.’는 기괴한 논리를 내세우다 아사히신문이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 연행했다는 요시다 세이치(사망)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과거 기사 16건을 오보로 인정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제 연행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곳곳에서 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년 전인 2012년,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이끌어낸 요시미 요시아키(66) 주오대 교수는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이 강제로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가 매우 많은 데도 이를 부인하는 몇몇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1993년 고노 담화가 발표된 직후에도 ‘위안부를 모집할 때 군이 하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모집하지 않았다’는 등의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거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군이 민간업자를 통해서 모았지만 대체로 ‘번듯한 일자리를 준다.’고 속여서 끌고 간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는 일본의 형법에서 유괴나 인신매매에 해당한다.”며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 동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전문가들은 대부분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요시다 세이지 씨의 진술에 관한 아사히신문 삭제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강제성의 근거는 명확하다고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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