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2023. 4. 10. 15:4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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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5월 3일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군 양성학교로 이회영, 이동녕 등이 1911년 6월 10일 만주 삼원보에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나중에 만주, 간도 일대에서의 무장 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기준으로 졸업생이 3500여 명이 되었으며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설립에 큰 힘이 되어주던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은 1910년에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만주로 건너간 이회영은 같이 따라온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이제 당신들은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라 하였습니다. 이들 이회영의 가족은 이항복의 후예로 그 아래로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 집안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일가가 소유한 곳은 바로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일부로 이들 형제들은 자신들의 전 재산 40만원을 처분하니 지금으로 따지면 60억 원에서 20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가 망한 마당에 가문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며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향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망명을 결심할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며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여기에 호응했습니다. 그리고 1913년 다나까 코죠의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 따르면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조선 황실 가족 외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의 벼슬아치만 69명에 달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이회영 일가도 일제의 보호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제 강점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이를 보고 이상재 선생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회영의 형제들은 그를 포함하여 건영, 석영, 철영과 넷째 회영을 포함, 시영, 호영으로 6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간도로 옮겨온 이회영, 이상룡을 포함한 민족운동가들이 한 첫 번째 일은 바로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학사에서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고 더불어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맡았습니다. 이후 1911년에는 신흥강습소가 개교하였으며 당시 강습소라고 부른 것은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실제로 양성한 것은 바로 독립군이었습니다.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1919년 삼일운동으로 인하여 신흥무관학교로 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만으로는 이들을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 제 3구 고산자가 부근의 하동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통화현 신화향,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두어 무관학교는 3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5월 3일에는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졌습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는 중등교육과 군사교육을 병행했고 6개월 훈련 과정과 3개월 훈련 과정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1개월 과정도 운영했습니다. 신팔균·지청천·김경천 등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대한제국 무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교관으로 임명되면서 더욱 전문적인 군사훈련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개편되자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북로군정서에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에도 어려움이 뒤따랐으니 일본과 그들과 협력한 만주의 봉천군벌이 신흥무관학교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1920년 5월부터는 중국과 일본이 합동 수색하여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습니다. 이어 봉오동 전투에서의 참패를 복수하고자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독립군 초토화 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이로써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게 되자 이들 지도부들은 잠시 몸을 피하게 되었고 지청천, 김동삼 등이 포함된 일부가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7월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여 1920년대 민족독립운동의 중추적인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회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이회영이 구상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새로운 투쟁의 중심축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열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제가 통치하던 시기였고 여기에 국내 인사들이 몸을 사리며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회영에게 협조를 잘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종이 신뢰하는 인물에는 조정구와 그의 아들 조남승 그리고 조남익이 있었습니다. 남승은 비서승, 남익은 시종으로 황제의 비서관이었습니다. 이회영과 조정구는 소론 백사공파 경주 이씨와 노론 퐁양 조씨로 통혼조차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이들은 황제를 망명시키기 위해 뭉쳤던 것입니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과 조정구의 딸인 조계진을 결혼시키기로 합의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그들은 고종황제를 국외로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아침에 주검이 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궁녀가 건넨 식혜를 마신 뒤 고통을 호소한 것입니다. 일제가 그들의 망명계획을 알아차렸다기보다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문건에 고종이 서명했으며 끝내 그것을 철회하지 않은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건립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삼일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우당 이회영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임시정부라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그보다 ‘자유연합적 독립운동본부’를 결성하자고 하였습니다. 특정세력을 중심으로 한 권력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우당 이회영은 신채호와 함께 무장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심화되자 이에 실망하여 이회영은 아나키스트 위주의 독립운동 조직을 한․중․일 항일 공동전선으로 확대발전시키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았습니다. 1924년에는 의열단을 후원해 조선총독부와 일제 요인들의 처단을 시도했고 1929년에는 김좌진등과 손잡고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전선을 넓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물단을 그리고 이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중․일 아나키스트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는 일본관동군 사령관 무토오 노부요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다롄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지만 이후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밀고로 체포당해 1932년 11월 17일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도 독립운동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으니 그의 형 이석영도 55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렇게 아낌없이 재산을 쏟아부은 탓에 이회영과 이석영을 비롯한 형제들과 가족들은 굶어죽거나 병사하였으니 이회영이 운명을 달리한 2년 뒤에 이석영도 쓸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언론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간도로 이주해 신흥학교를 세운 일등 공신이고, 이역의 땅으로 이주한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며 신흥학교 경영에 전 재산을 바쳤다. 그는 평소 곤궁한 생활에도 조금의 원성도 없고 후회도 하지 않았다’(이석영 씨의 공(功), ‘한민 제3호’)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이회영 일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지위, 생명까지 포기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형제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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