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승리 봉오동 전투
2023. 1. 19. 18:5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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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일어서 우리나라는 외국의 침탈에 무방비상태였고 결국 1910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애국지사들의 독립활동은 국내에서 예전처럼 활발히 할 수 없었던 바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독립에 대한 활동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에 대한 기운을 키우고 자치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가 한편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던 즈음인 1919년에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만주와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군과 경찰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일본군을 상대했던 무기들은 상당히 비쌌는데 당시 연해주에는 1차 세계 대전으로 체코의 부대가 출병한 바 있었고 이들이 돌아가면서 우리 독립군에게 무기를 팔고 갔습니다. 그렇다고 헐값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포들이 모아온 군자금으로 꽤나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입한 무기들은 독립군이 있는 곳까지 운반하는 것도 상당히 힘겨운 일이었는데 중국과 소련의 감시를 피해야 했고 때로는 이들에게 뇌물을 주어 날라야 했습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각지에서 구입하느라 여러 가지 무기를 구비해 놓았는데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 루거 권총, 기관총 등 여러 무기들을 구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당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에게도 흘러들어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1920년에 군사통일회의를 주최하여 대한독립군, 대한국민군, 군무도독부를 하나의 군단으로 만들었으며 이들은 대한북로독군부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군사조직이면서 행정조직까지 갖추었고 홍범도 장군은 군사분야의 최고 책임자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시금 결성된 부대는 다시 국내로 진입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국내로의 진입은 있었지만 군단이 통일된 이후 계획된 작전은 이전에 없었던 대대적인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오동 근처에 700~800여 명의 군사들과 신민단의 독립군도 모여들었습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의 한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 북방 5리에 있는 헌병순찰대를 급습하였고 일본군 1개소대를 섬멸합니다. 이에 일본군은 크게 당황하였고 독립군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남양 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두만강 너머로 출병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군을 뒤쫓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애꿎은 일본군의 총칼은 한인동포에게 향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독립군 부대는 삼둔자 산기슭에 잠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왔을 때 다시 공격을 퍼부어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삼둔자 전투에 일본군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2번 연속 크게 당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두만강을 수비하는 일본군 중에 제 19사단이 있었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월강추격대대를 조직하여 독립군을 없애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아남은 장교와 병사들도 합류하였습니다. 그리고 월강추격대대는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6월 6월 저녁 9시 이들은 독립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이러한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던 홍범도는 주민들을 미리 산중으로 피신시켰으며 제 1중대는 봉오골 윗마을 서북쪽에, 제 2중대는 동산에, 제 3중대는 북산에, 제 4중대는 서산 남쪽에 매복하도록 하고 본인은 2개의 중대를 이끌고 서북면 북쪽에 매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부와 잔여 병력은 군무국장 이원에게 맡기면서 탄약보급과 음식조달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명령을 받은 이화일 제 2중대 3소대 1분대장은 일본군을 유인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일본군대대에서 보낸 정찰대가 왔을 때 일부러 패하면서 유인해야 했는데 독립군은 그렇게 승리에 고취되어 일본군에게 집중타격을 하여 일본군을 물러나게 하려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이 공격이 유인작전이라는 생각은 못했고 따라서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봉오동으로 들어섰습니다. 아무도 없는 봉오동, 당시 홍범도 장군의 지시로 매복해 있던 것입니다. 이에 정찰을 맡은 일본군은 독립군이 도주한 것으로 판단하고 월강추격대대에게 봉오동으로 들어올 것을 연락했습니다. 그렇게 봉오동으로 진격한 일본 월강추격대대, 그리고 이들은 봉오동 마을에서 우리 동포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다 중동, 상동마을로 진군하고 상동마을 남쪽 300미터 지점의 갈림길까지 왔습니다. 일본군은 점점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위망에 걸려들었을 때 홍범도 장군의 지시로 일제히 사격이 가해졌습니다. 일본군도 대응사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독립군에게 유리했고 일본군의 피해가 계속 나왔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도주하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도 독립군의 추격에 재차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의 중상자, 100명의 경상자가 나왔습니다. 독립군은 전사자가 4명에 경미한 부상자 3명이 나왔습니다. 당시 이 전투는 중국의 신문에도 실렸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해하는 독립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 봉오동전투는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을 패퇴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투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의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체코군단으로부터 공급받은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코군단이 한국독립군에게 무기를 대게 된 배경에는 당시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특사와 여운형 등 한국독립운동가의 만남과 관계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18년 상하이로 파견된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을 여운형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만날 수 있었고 이 때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건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크레인 특사가 여운형 등에게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접촉해 볼 것을 제안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크레인은 재계 거물이기도 했는데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초대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리크 대통령은 체코독립운동의 지도자로 1918년 10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힘입어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를 이끌 수 있었고 크레인에게 여운형 등과의 면담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1919년 말에는 여운형은 체코군단이 주둔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군단 지휘관 라돌라 가이다 장군을 만났고 체코군단인 1920년대 초 무기와 탄약을 북로군정서 등 한국 독립군에게 넘기기 위한 협력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구입한 무기들이 봉오동전투, 청산리 전투 뿐만 아니라 194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항할 때에도 여전히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동포들의 군자금으로 얻어낸 체코군단의 무기, 그리고 여기에 지략을 불어넣어 독립군에게 승리를 안겨다 준 홍범도 장군은 어떠한 사람일까. 그는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였으며 그 중에 공장에서 일한 경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7달이나 품삯을 받지 못하고도 되려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내야겠다는 공장주의 어이없는 말에 공장주를 뿌리치고 금강산에서 스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스님이 되었으나 여승과 정이 통해 뱃속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크게 분노해 항일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1895년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을 같이 하고 의병을 일으켰고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처치하며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제와의 여러 격전을 벌여 승리를 얻은 바 있는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지휘하며 승리한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쳤으며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 사후 78년 만에 유해 봉환이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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