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가묘만 있는 이유

2023. 4. 14. 15: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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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안태훈이고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할아버지는 미곡상을 운영하여 집안이 부유하였고 안태훈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 안중근의 집에 머물고 있던 백범 김구는 『백범 일지』에서 소년 안중근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큰아들이 중근으로 그 때 나이 열여섯살이었는데 상투를 틀고 자주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동방총(메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장총의 일종)을 메고는 날마다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사냥 다니는 것을 일로 삼았다. 사냥할 때도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시키는 재주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하루에 노루, 고라니를 여러 마리씩 잡아왔다. 그것을 가지고 군(軍)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즈음 안중근은 프랑스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프랑스어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국에 대한 걱정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에서 다시 한 번 비보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재산을 정리하여 교육에 힘을 쏟기로 하고 평안도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황해도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이 학교들을 운영하기 위하여 석탄판매회사도 운영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고 안중근은 이 때에 관서지부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1907년 7월에는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었고 군대까지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안중근은 조국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에는 의군장으로서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경흥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무장독립투쟁을 택하였으며 그의 직함은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수백의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진입작전이 이루어지니 그 때가 1908년이었습니다. 그 때 그의 부대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함경도 쪽 국경을 넘어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소탕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일본군을 제압하고 포로들을 사로잡았는데 이 때 그는 국제법상 전쟁 포로에 관한 규약을 엄수해야 한다며 안중근이 이들을 풀어주겠다 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이루어진 그의 결정에 의병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석방된 포로들은 다시 안중근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이후 안 의사는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다 1909년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 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써내려갔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그의 귀에 조선을 침략한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주 하얼빈 역에서 만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같이 사람들이 바로 안덕순, 유동하, 조도선이었습니다. 
‘군대가 늘어선 있는 뒤를 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그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만 늙은이가 이처럼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 것이 필시 이등(이토 히로부미) 노적(老賊)일 것이다. 곧 단총(권총)을 빼어들고 그 오른쪽을 행해서 쏘았다.’ 자서전
안 의사는 같은 해 10월 26일 오전 9시쯤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고,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될 당시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세 번 외쳤습니다. 이후 그는 중국 랴오닝 성 다롄시 뤼순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일제의 일방적인 절차로 진행된 심문과 재판에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이등이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 소격시키므로 한국의 의병중장의 자격으로 주살하였던 것이다. (…) 나는 한국의병의 참모이며 지금 적군의 포로가 되어 와 있으므로 마땅히 나에게는 어느 나라 법이 아니고 포로에 관한 만국공법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이유도 덧붙였습니다. 
‘하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하나,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둘,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셋,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넷,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그러면서 안중근은 일제가 자신에게 붙인 암살자라는 말을 부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범죄자가 아닌 교전 중의 포로로서 처리되어야 한다고 한 것인데 일제는 그의 말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 2월 14일 일본 형법 32조의 일반살인죄로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동지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았으며 이러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집행되었고 이후 일본이 뤼순감옥 북쪽 어딘가에 유해를 묻었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돌아온 백범 김구는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그 옆에는 언젠가 안치될 안중근의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습니다. 
한편 안중근의 어머니의 조마리아의 편지내용이 나와 많은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편지의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의 의거일이고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12월 23일에 안중근은 처음 면회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전달한 것은 조마리아의 편지가 아니라 전언이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는 이후 신묘(神妙)하게 형(刑)을 받아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너라. 너가 형을 받을 때 빌렘 신부님이 너를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가서 너 대신 참회를 올릴 것이니, 너는 그때 신부님의 인도 아래 우리 교회 법도에 따라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거라.”
그리고 뮤지컬과 영화 「안중근」에서는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는 말이 나오지만 실제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 동양의 평화를 위한 행위였다는 것을 말해왔고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담을 『동양평화론』을 옥중에서 저술하려 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3월 26일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동생들은 형의 시신을 달라고 했으나 묘지가 항일운동의 성지가 될까 두려웠던 지라 일본은 위치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고 이것이 안중근의 가묘가 효창공원에 있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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