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독립운동사의 최대 승리 청산리 전투

2023. 1. 21. 18:5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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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봉오동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참패 이후 일제는 다시 심기일전을 합니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을 최강이라 생각해왔는데 봉오동전투의 패배로 자신들의 명성에 금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에게 당한 패배라 일제는 이를 더욱 막고자 했고 독립군의 세력이 커진다면 이것이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제가 세운 정책은 ‘간도지방 불령선인토벌계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불령선인이란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의미하는 단어로 일본군이 만주로 진격하여 독립군을 직접 처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만주군벌인 장작림의 동의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장작림의 부하 중에는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삼아 대한국민회가 중국 관리 맹부덕과 비밀타협을 맺고 장작림 부대는 일본군의 압력으로 부득이하게 독립군을 압박할 것을 대비, 독립군이 근거지를 떠나 삼림지대로 옮길 적에 그에 따른 필요한 시간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길림성의 연길현, 훈춘현, 왕청현, 화룡현의 4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그러니까 북로군정서, 군민회군, 서로군정서 등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장작림의 부대는 1920년 8월 28일부터 9월 27일까지 비어있는 독립군의 근거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요구에 응하는 척 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세운 ‘간도지방 불령선인토벌계획’은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군이 만주로 직접 토벌하겠다고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로 들어가기로 하고 그 사건이 바로 훈춘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920년 9월 12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훈춘 일본 영사관을 정체불명의 마적이 습격한 사건으로 1차 습격은 동녕의 노흑산지대에서 활동한 만순이라는 비적이 그의 상급 비적두목이던 코산의 지시로 일으켰습니다. 코산은 야마모토 기쿠코라는 일본여인을 첩으로 두고 있으니 친일적인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훈춘사건을 조작한 훈춘일본영사관

“음력 8월 1일 아침 5시경 300~400명이나 되는 한 무리의 토비들이 갑자기 훈춘성을 포위하고 먼저 변방초소에 불을 지른 후 관은전호(官銀錢號), 현공서, 세무국, 전보국에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했다. 일본경찰서·영사관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토비들은 8시30분경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납치된 자가 중국인 80여 명, 한국인 6명이다. 현성의 손실은 수만조(吊)에 달한다.”1920년 9월 16일자 「길장일보」
기사만 보면 일본군의 영사관의 피해보다는 중국의 관리와 민간인들이 피해본 사건이었습니다. 본래 훈춘에 있는 일본의 영사관에 피해를 주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의 습격하려던 계획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장강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2차 습격을 일으킵니다. 다른 기록에는 진동과 만순이 일으킨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10월 2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일본에도 약간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영사관은 비어있었으며 빈 영사관을 불을 지른 것이 마적이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중국의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장작림을 압박하는 한편, 중국내로 일본군의 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투입된 일본군은 조선 주둔 19사단을 중심으로 20사단, 시베리아 파견국 14사단과 11사단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이들은 18000명에서 2만 여명에 달하는 대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소총은 물론, 기관총과 대포 등 중화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였습니다. 그들이 봉오동전투패배에서 느낀 위기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독립군도 예견한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독립군은 근거지를 옮겨야 했는데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와청현 서대파를 떠나 40일간의 여정을 통해 10월 5일 화룡현 삼두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 근처에는 청산리가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이 이 곳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서막은 바로 백운평 전투로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에 일어났습니다.
 “맹렬한 급 사격을 가한지 약 20여 분 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 「독립신문」 제 88호 백운평 전투정보 

김좌진 장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벌어진 천수평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로부터 천수동에 일본군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보병보다는 기병과 포병대를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5000여명에 달했습니다. 이에 독립군은 승리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당시 북로군정서군의 규모는 600여 명 미만, 그렇다고 무기에서도 앞설 수 없었던 이들은 지형으로 이 숙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병력과 무기에서 우위를 점했던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지형에서 유리한 곳을 선점한 독립군과의 대결, 하지만 일본군은 이러한 독립군을 점점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어랑촌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이 북로군정서군에 지원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홍범도가 거느린 부대는 1500여 명으로 독립군 기준에서는 대부대였습니다. 홍범도의 부대도 일본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니 그 자리를 일본의 다른 토벌대가 자리하였고 이를 독립군으로 오인한 일본군이 이들을 공격하고 여기에 독립군의 공격까지 더해져 일본군부대에서 4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부대일부를 격퇴하고 도우러 온 것입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만 상대할 줄 알았던 일본군은 숫적인 우세에도 불구 전열을 나누어 홍범도의 독립군과도 상대해야 했고 독립군은 아군의 가세로 크게 사기가 올라 일본군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에서 많은 피해가 나왔는데 그들은 중화기로 무장한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숫자가 적은 비정규군인 독립군에게 몰러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큰 손실을 가져온 것입니다. 날이 저물면서 독립군은 철수하여 23일 일본군과 작은 교전을 벌이면서 이동하였습니다. 독립군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에 독립군의 야영지를 급습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일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대피하였다가 다시 일본군을 역습하였으며 포위당했던 독립군은 다시 일본군을 포위하는 상황이 되어 일본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군도 안도현지역으로 빠져나감으로서 청산리에서 있었던 전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독립군의 전사자는 1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뒷받침에는 바로 동포들의 지원이었습니다. 이들은 굶어가며 전투를 하는 이들에게 주먹받은 넣어주었으며 가난했지만 자신들의 돈을 모아 군자금을 댔습니다. 하지만 당시 밥을 운반해주던 마을은 일본군의 보복으로 학살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 장완린(중국 작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1920년 말경에 북만주의 밀산에 있다가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조직체를 건설을 바라는 격문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독립군은 이에 따라 러시아령 연해주로 갔다가 1921년 4월에는 독립군단체들이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이루었으나 6월에는 러시아자유시에서 무장해제당하고 대한독립군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30년 1월 박상실이라는 공산주의청년에게 암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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