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의열단
2023. 1. 16. 18:4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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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중에 무력으로 투쟁을 벌인 단체도 있었으며 그러한 단체에는 의열단이 있었고 의열단을 이끄는 단장은 김원봉이었습니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습니다. 김구가 현금 60만원 (약 200억원)의 현상금을 걸렸는데 김원봉에게는 현금 100만원(약 300억원)을 내건 것입니다.
김원봉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보통학교에 편입하였습니다. 하지만 1911년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변소에 버렸고 이로 인해 김원봉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후 동화중학에 편입한 김원봉은 학교가 일제에 의해 사라지자 표충사라는 절에 머물며 독립운동에 관한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와서 중앙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결국 중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중국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한 학교에 다니며 군대와 무기에 대한 군사학을 배우고 대학에서는 영어를 공부합니다.
그러던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에 관한 회의로, 1919년 1월 18일, 프랑스 외무부에 전승국인 27개국 대표가 모여 강화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에 조선의 대표로 김규식이 참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이에 김원봉은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고 때문에 일본에 조선을 독립시켜준다던가 강대국이 조선에 편에 서서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김원봉도 파리에 자신의 뜻과 같이 하는 사람 한 명을 파리로 보냈습니다. 김규식처럼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회의에 참석한 일본의 대표를 암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작전은 현지에서 무기를 잃어버려 실패로 끝났지만 여기에서 김원봉이 하려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일본의 주요 요인을 암살하고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후 김원봉은 자신의 뜻과 함께 할 젊은 친구들을 모아 단체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의열단입니다. 여기에 모인 젊은이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하기로 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공약 10조'와 함께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칠가살·七可殺)과 '다섯 가지 파괴'(오파괴·五破壞)를 선정,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김원봉이 단장에 해당하는 의백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의열단은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9년 상해에서 해산하기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것만 하더라도 34건에 달하는 활동을 하였고 경찰서와 수탈기관 폭파, 그리고 고위장교 및 경찰서장 등 고관들을 저격하는가 하면 도쿄에서 일왕궁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에 긴장감을 주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닙니다. 투척한 폭탄이 불발되거나 실패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긴장한 일제는 의열단원과 김원봉 잡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열단의 활발한 활동에도 그 규모나 인물에 대해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규모는 많게는 1000명에서 적게는 100명 안팎으로 보고 있으며 조선총독부 경무국 첩보를 보면 의열단원 숫자를 200명 안팎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 보고된 19213년 SIS 극동지부 보고서는 의열단원을 약 2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도쿄에도 50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미국의 여류작가 님 웨일즈는 의열단원이었던 김산을 인터뷰해 소설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을 약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스스로 의문부호를 달았습니다. 그들의 폭력적 독립운동에 대한 비난이 일었고 따라서 그들이 일제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의 주요요인을 암살한다 한들 그 이유에 대해 민중들이 알지 못한다면 의열단이 하는 행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의열단을 정신을 드러낸 선언문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통하여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역사학자 신채호였습니다. 당시 신채호는 의열단의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리고 의열단의 폭탄제조소를 시찰하고 나서 김원봉에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문」을 써주었습니다. 그 때가 1922년의 일입니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가 주장한 것은 민중 직접 혁명입니다. 신채호는 비단 민중을 이 세계의 변화를 이끌 주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뿐만 아니라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여기에서는 다른 독립운동에 대한 지적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선언문 작성도 그가 가지고 있던 독립방법에 대한 신념과 김원봉의 생각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채호는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제와 맞서 싸워왔고 평소 일제에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옷을 다 적시더라도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신채호는 아나키즘 사상을 신념으로 삼았는데 어떠한 정치권력과 정부의 상태도 부정했으며 민중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을 담아 의열단의 선언문은 「조선혁명선언」이 작성된 것입니다. 김원봉은 이 선언문을 의열단원들의 품 속에 지니게 하고 틈 날 때마다 읽어볼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이후 1923년 1월 12일 서울한복판 졸로경찰서 서편 유리창을 뚫고 폭탄 하나가 날아와 터졌습니다. 이 폭탄을 던진 이는 바로 김상옥으로 의열단이었고 17일에 자신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포위당하자 총격전을 벌이며 형사부장을 사살시키고 여러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19일엔 효제동의 한 집에 머물다 수백명의 무장경관에게 포위당하자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펼치다 10여 명을 살상하고 마지막 탄환으로 자결을 선택합니다. 또한 선언문이 나온 이후 김지섭이 일본에서 황궁 앞 이중교라는 곳에 폭탄을 던졌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고 이후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열단의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데에는 그들의 품에 지니고 있을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문」이 있던 것입니다. 또한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도 이러한 의열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의열단의 활동에는 단원들의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이에 김원봉은 무장독립전쟁쪽으로 투쟁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군사학교에서 군사학과 정치학을 배운 뒤,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합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김원봉은 조선이 독립하고 귀국하면서 미군정과 우익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공격받았습니다. 또한 1947년에는 친일순사로 악명을 떨치던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심한 모욕을 당했으니 이 일로 김원봉은 삼일을 서럽게 울었다고 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붙잡히지 않았던 그가 친일출신 경찰에 심한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 분함을 느낀 것입니다. 이후 1948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는데 그러한 배경에는 친일파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북으로 간 김원봉은 지난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북에서 숙청되었습니다.
그럼 노덕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에게도 위기가 닥쳤으니 그것은 바로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가 출범한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구해준 이는 이승만이 이었습니다. ‘반공특사를 함부로 구금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들었고 이에 반민특위가 거부하자 겨찰을 동원해 특위를 일거해 해체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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