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은 왜 강화로 천도했을까.
2022. 9. 18. 18:5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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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시기 최씨 무인정권은 안정기에 들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바로 몽골이 성장하고 있었으니 그 기세가 세계를 정복할 듯하였습니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태어난 테무친이란 자가 1206년 유목민 집단 집회를 개최하여 몽골제국을 만들고 자신은 ‘빛의 신’이란 의미로 칭기즈 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일념으로 군대를 재편하고 그의 탁월한 군사재능과 막강한 힘으로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215년에는 금나라로 진격해 북경을 함락하고 동시에 몽골군은 카스피해, 남쪽 아라비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던 1216년 칭기츠 칸의 침략에 쫓긴 금나라에 의해 밀려난 거란군이 고려쪽으로 넘어 들어왔습니다. 당시 고려군은 개경까지 밀려나는 어려움에 처해있었는데 1218년에 몽골군과 동진군의 군사가 거란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고려로 넘어왔습니다. 당시 칭기츠 칸은 호라즘 제국과 일전을 벌였으므로 대신 합진이라는 몽골군 장수가 칭키츠 칸의 명령이라며 형제국을 맺자는 제안을 해 옵니다.당시 집권자인 최충헌은 우선 그들과 연합하여 거란을 내몰기로 하였으니 1219년, 거란이 항복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는 몽골과 형제국을 맺었습니다.
이후 교정별감에 오른 것은 최이(최우)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몽골이 많은 공물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 양은 고려 정부가 감당하기에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당시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이를 수행하였는데 그가 압록강을 건너다 도적을 만나 피살당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고려 정부에서는 이를 도적의 소행이라 했지만 몽골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맺어진 형제국가는 없어졌고 두 국가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지자 최우는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인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의 자문을 받는 서방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결정권한은 최우에게 있음을 이야기했고 고종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였으니 허수아비왕이 되었습니다. 그 즈음 칭기츠 칸이 죽고 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왕위에 오르니 그 때가 1229년입니다. 그리고 1231년에는 저고여를 살해한 책임을 고려에게 물으며 고려가 침략해 왔습니다. 살레타이의 지휘 아래 침입한 몽골군은 귀주성에 이르러 서북면병마사 박서, 분도장군 김경손과 맞닥뜨렸습니다. 몽골군은 5개월에 걸쳐 6차례 공격을 했으나 귀주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이에 고려정부는 몽골군에게 많은 선물을 주며 투항했고 이에 몽골군은 다루가치를 주둔시고는 물러갔습니다. 이들은 물러가며 다시 한 번 귀주성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몽골의 한 늙은 장수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이처럼 심한 공격을 받고도 버티는 병사들은 처음이라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몽골군이 고려에 침략하였을 때 고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니 그 때가 1232년이었습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가 군대를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합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것은 고려가 몽골에 저항하기 위하여 임시로 강화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일시적인 천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정부는 강화를 황도라 불렀다는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화도는 고구려군의 혈구군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에는 해구군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고려 초에는 강화현으로 명칭이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고종 19년에 왕이 몽골침략군을 피하여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강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임시가 되었던 아니었던 간에 고려입장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긴 것은 고종 18년 1231년부터 이어진 몽골의 침략이라는 비상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몽골군이 1차 침략한 1231년에는 11월말에 개경근처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고려 정부와 화의를 하고 나서 이듬해 1월에 철수하였습니다. 그 다음달에 곧바로 천도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 7일에는 고종이 강화도에 도착했으니 나라의 큰 일인 도읍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만큼 긴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천도를 결정하고 나서는 해당 대상지가 강화라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몽골군이 침입했을 적에 승천부사 윤린, 녹사 박문의가 몰래 가족을 강화로 피난시켰습니다. 이 때 그 유용성을 확인하고 당시 집권자이던 최우는 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게다가 이곳은 이미 몽골과의 일전에서 전면전을 택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항전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최씨 정권이 자신의 안위를 보호하는 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정별감 최이는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고 도읍지를 옮길 생각을 한 것입니다. 몽골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몽골이 설치하고 간 다루가치들이 횡포를 부릴 수 있고 그들이 바라는 공물을 곧이곧대로 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따라서 몽골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점을 생각하여 강화로 옮긴 것입니다. 고려 조정은 강화로 들어가면서 전국의 백성들에게는 몽골과의 전면전을 대비해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몽골은 이를 곧 자신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몽골의 2차 침입을 부른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강화도로 떠나면서 몽골이 두고 떠난 72명의 다루가치들을 다 처단한 것입니다. 전례없는 일을 당한 몽골은 고려는 이제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사천로 이루어진 강화로의 천도였지만 200년의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떠날 때에 분명 반대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승단이라는 문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규보와 함께 이름을 알린 자였으며 이규보하고도 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강화도 천도에 반대한 이유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으며 예로써 대한다면 저들이 우리를 괴롭힐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도를 강화로 옮긴다면 내륙의 백성들은 몽골의 침략 아래 괴롭힘을 당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 없이 섬으로 가는 것은 좋은 대책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유승단은 고종의 총애를 받은 자로 고종 역시 강화도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종이 아닌 무신인 최이가 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도 후 두 달 만에 유승단이 사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당시의 분위기는 천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었지만 쉽게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개경에는 10만 호나 되는 집들이 있었고 그 거처를 편안히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를 버리고 강화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최이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었고 따라서 유승단의 죽음 역시 석연치 않은 것입니다.
그럼 이규보는 어땠을까. 이규보는 1190년에 유승단과 함께 과거에 합격했지만 강화천도문제에 대해서는 유승단과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이규보의 진심은 어땠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최이가 강화천도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최이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으니 그의 진심이 어떻든 간에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 것에 대해 찬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천도는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인데 일사천리로 끝낸 것에 대해 극찬하며 천도를 하지 않았다면 고려는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강화 천도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1233년에 재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몽골의 침략이 이어지는 동안 최이는 강화도에서 그들만의 낙원을 즐겼습니다. 몽골군의 2차 침입 후 돌아가자 이는 오히려 강화천도에 대한 명분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강화는 몽골에게는 난공불략의 섬이 되었고 최이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느라 백성들은 죽어나갔습니다. 사실상 최이의 강화천도는 몽골과의 일전을 다짐한 작전이 아닌 최이정권을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최이는 강화로 천도한 후 군사력을 키우거나 다른 국가와의 연대도 시도하지 않았고 어떠한 방식으로도 내륙의 백성을 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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