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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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와 온조는 형제였을까.
비류와 온조왕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말라 살기에 적당치 않았습니다. 비류는 비류국을 세웠으나 13년 만에 멸망하여 십제에 병합되었다는 이야기가 백제 건국 설화에 대한 요약입니다. 한편 문학산 일대의 전설과 민담의 수집을 한 결과 비류와 온조(온조왕)은 삼각산에 올라가 서로 살 곳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으므로 미추홀의 문학산에 성을 쌓고 살게 되었고, 동생인 온조왕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비류가 세운 곳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 적당치 않았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비류는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에 ..
2024.05.03 -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했을까.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백제 근초고와아 시기에 이미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전체를 병합했다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도 근거는 있습니다. 바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49조, 그러니까 369년의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공황후가 파견한 군사가 비자발,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의 7국을 평정했다. 이어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해진에 이르고 남만 침미다례를 정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초고(근초고왕)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니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스스로 항복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왜군이 단독으로 가야 7국과 이른바 ‘마한’ 침미다례를 정벌하고 나서..
2024.04.26 -
백제 불국토를 꿈꾼 창왕
1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554-598)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 목탑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되었습니다.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재위기간 중 정유년은 577년입니다. 사리함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
2024.01.06 -
관산성 패배 뒤에 왕위에 오른 창왕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사적 제427호 '부여 왕흥사'는 백제의 대표적인 왕실 사찰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목탑 터에서 발견한 '왕흥사지 사리기(보물 제1767호)'에서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정유년(577년) 2월 15일에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리기를 통해 절의 발원자와 창건 연도, 창건 배경 등을 확인, 백제史 연구의 전환점이 되는 등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창왕은 백제 왕으로서 집권한 기간은 45년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미비합니다. 그에 대한 기록으로는 성왕의 맏아들이었다는 것과 죽은 뒤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왕에 대한 기록을 해외에서 찾자면 『일본서기』에서 확..
2024.01.03 -
위기를 기회로, 백제 동성왕
백제 삼근왕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면 후계자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삼근왕의 연령을 볼 때 그에게는 아들이 없거나 있다고 하여도 지극히 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24대 동성왕입니다. 따라서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사마와 모대가 그 후보가 되었고 모대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동성왕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 역사서와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여대(餘大)'로 나옵니다. 동성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남제서』에는 동성왕의 조부의 작호를 받은 것으로 이해했으며 『남제서』를 인용한 『..
2023.11.14 -
문주왕의 웅진천도와 해구의 국정농단
문주왕은 백제의 제22대 군주로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는 문주왕에 대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가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고 있고 개로왕 대에 상좌평에 있던 사람은 문주였습니다. 상좌평은 왕의 동생이나 왕의 장인이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주왕은 개로왕이 피살당할 즈음 신라에 파견되어 1만 명의 군사지원을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성이 함락되어 많은 왕족들이 제거되었고 그나마 남은 직계가 문주왕이었습니다. 개로왕의 또다른 동생 곤지가 있었으나 그는 왜국에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목협만치나 조미걸취가 ..
202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