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57)
-
동성왕 피습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서기 501년, 동성왕이 백가에 의해 피습됩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해구에게 시해되고 삼근왕도 즉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이가 바로 동성왕입니다. 고구려의 압박과 더불어 앞선 왕들이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던 지라 동성왕의 불안감은 더했을 것입니다. 개로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 즉 직계가 아닌 방계 왕위계승이었습니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삼국사기』 「동성왕본기」 합영화라는 것은 이삭이 합쳐져 있는 벼를 말합니다. 원래 한 줄기에서 하나의 이삭이 나는 벼인데 또다른 이삭이 같은 줄기에서 나왔다는 것인데요. 국남해인, 나라의 바닷가 사람들이 바쳤다고 합니다. 무진주에 있던 세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데요. 즉, 옹관묘를..
2023.11.08 -
부여태비가 된 백제 마지막공주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 묘지명은 2007년 10월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2004년 중국 산시(陝西)성 고고연구소가 시안 북쪽에 위치한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에서 도굴당한 무덤을 조사하다가 부여태비와 남편인 사괵왕(嗣?K王) 이옹(李邕·678~727)) 부부의 합장묘임을 알려주는 덮개돌(개석·蓋石)과 묘지(지석·誌石) 각 한쌍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중 부여태비의 덮개돌(탁본 사진)은 가로 74㎝, 세로 70㎝, 두께 13㎝이며 전서(篆書)로 3행(行) 9자(字)의 ‘당고괵왕비묘부여지명(唐故?K王妃墓扶餘誌銘)’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었습니다. 지석은 가로 74㎝, 세로 70㎝, 두께 9㎝이며 30행, 1행 31자로 총 831자가 해서(楷書)로 음각돼 있습니다..
2023.11.02 -
백제는 언제 일본에 문자를 전해주었을까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 수륙 3000리나 되는 대해의 가운데에 산으로 된 섬에 의자하여 살고 있었다. … 개항20년에 성이 아매이고 자가 다리사북고이며 호가 아배계미인 왜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대궐에 들게 하였다…. (왜국에는) 문자가 없어서 다만 나무막대기에 금을 새기고 끈을 맺어 썼을 뿐이다. 백제로부터 불경을 전해 받아 불법을 경신하고부터 비로소 문자가 있게 되었다.’ 『수서』 ‘왜국전’ 수 문제의 개황 20년은 서기 600년 정도 되는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수나라에서는 왜국의 풍습을 들으며 그들이 문자를 접한 계기를 위와 같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사실을 기록한 국내의 서적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일본의 사서에 기록된 ..
2023.10.22 -
백제유민출신 당장수 사타충의
사타충의는 백제 유민출신의 당나라 장군으로 출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돌궐의 사타(沙陀) 계열이 아닌가 의심받았습니다. 하지만 《문원영화》에서 그의 출신을 삼한구족(三韓舊族), 즉 한국계 유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沙) 가문 출신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택씨는 백제의 명문귀족으로 특히 사비부여시기에는 8대 귀족 가문 중에서도 첫째 가는 집안이었습니다. 당으로 간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이 다 그렇듯 사타충의의 출생연도는 불확실합니다. 다만 당으로 이주한 사택 씨중에는 사타상여와 사타천복이 있으며 사타충의는 7세기말에서 8세기 초에 요직에 있어 전쟁을 수행하니 그가 20세를 전후하여 백제의 멸망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제 유민으로서 당나라에서도 활약한 것은 아마..
2023.08.25 -
백제 부흥운동 (2)
백제부흥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군량미와 물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화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주류성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왜국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는 멀어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제부흥운동군은 근거지를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도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인 주류성의 위치 비정은 그야말로 제각각인데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며 충남 홍성군의 학성산성설이 있는 반면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설,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설 또 전라북도에서는 정읍시의 두승산성설과 부안군 상..
2023.08.24 -
백제부흥운동 (1)
백제의 의자왕이 항복했지만 모든 백제인이 이에 동조한 것은 아닙니다. 사비성과 일부지역만 항복했을 뿐, 나머지 지역의 성들은 다음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부흥운동의 조짐이 보였고 왕족인 복신이 부흥운동을 참여하면서 부흥운동은 점차 조직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솔계(率系) 관등을 보유하고 있던 지방군장이 참여하였고 여기에 도침같은 승려도 동참했습니다. 복신은 의자왕이 항복하자마자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임존성에 그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3만 여명이나 몰려들었습니다. 계곡이 깊어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한 임존성은 사방 조망에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660년 8월〕 26일에 나당연합군은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상대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2023.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