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57)
-
백제 멸망하다
‘ … 백제국은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兵器)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럽게 섞여서 서로 연회만 베풀고 있는데,… 그런데 너희 나라는 부인(婦人)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서 도둑을 불러들여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후략)’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643년의 기록입니다. 당시 백제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더불어 백제의 동정도 살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때 당나라가 신라의 여왕(女王) 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 수(隋) 이래 요동과 한반도까지 진출하여 대일통(大一統)을 확장하려는 동북아 전략이 배후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
2023.08.22 -
백제멸망의 징후
'안으로는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으니 형벌이 미치는 곳은 오직 충량에 있었다’ 이 문장은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은고는 백제 의자왕의 처로 역사상 유일하게 기록된 의자왕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횡탈하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자초했다.’ 『일본서기』 소정방의 글이나 『일본서기』를 기록이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보아 대부인 은고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고를 지지하는 집단은 신진귀족세력이었고 은고는 의자왕에게 받은 총애를 바탕으로 자신이 낳은 효로 하여금 태자로 교체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2023.08.21 -
의자왕의 지속적인 신라압박과 왕권강화
649년 백제는 진천과 천안 일대에서 다시 한 번 일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백제의 군사는 좌장 은상이 이끌었습니다.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습니다. 곳곳에서 신라군과 싸웠으며 백제는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이에 신라 쪽에서도 신라 장수 유신, 진춘(陳春),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이 지원했습니다. 이들의 전투는 열흘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투는 전개되었고 은상은 최후의 결전으로 김유신이 주둔하고 있던 도살성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백제군은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는데 이에 김유신이 도살성(道薩城) 아래 자리 잡고 “오늘 백제 사람이 정탐하러 올 것이다...
2023.08.20 -
백제 의자왕 집권 전반기 신라 공략
의자왕은 백제의 31대 왕으로 632년에 태자가 되었고 641년에 왕이 되었습니다. 태자가 된 632년은 의자에게 40세의 나이였습니다.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그의 정치적 기반은 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정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로 따라서 왕제들의 반발 움직임에 미연에 방지하고 왕족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젊은 시절부터 품행을 단정히 하여 귀족 사회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반면 귀족들은 의자의 동생인 교기(翹岐)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무왕이 집권후반기에 시도한 익산 경영과 관련있을 텐데요. 당시 익산 경영은 연로했던 무왕 대신 태자인 의자가 왕명을 받들어 추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마 태자로 책봉된 632년 즈음..
2023.08.19 -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한 백제 무왕
무왕은 즉위 2년 만인 602년 8월, 군사를 이끌고 아막산성을 포위합니다. 무왕이 아막산성을 공격한 이유는 이곳을 빼앗아 남원-함양선을 돌파하여 옛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신라 증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을 보내 백제군의 공격에 맞서게 하여 백제군을 퇴각시키고 아막산성을 주성으로 하여 소타(小陀),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등 4개의 성을 쌓아 아막성의 부성으로 삼았는데 아막산성을 모산성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라는 이렇게 아막성과 소타성을 연결하여 백제가 남원 방면에서 가야로 진출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한편 무왕은 신라에게 패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좌평 해수장군으로 하여금 다시 4성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신라 장군 ..
2023.08.18 -
백제시조 구태는 누구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북사』 열전 백제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위 기록들에서 보이는 구태는 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미스테리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태를 실존 인물로서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부터 관념상의 건국 시조로 보..
2023.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