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의자왕 집권 전반기 신라 공략

2023. 8. 19. 09:2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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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백제의 31대 왕으로 632년에 태자가 되었고 641년에 왕이 되었습니다. 태자가 된 632년은 의자에게 40세의 나이였습니다.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그의 정치적 기반은 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정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로 따라서 왕제들의 반발 움직임에 미연에 방지하고 왕족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젊은 시절부터 품행을 단정히 하여 귀족 사회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반면 귀족들은 의자의 동생인 교기(翹岐)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무왕이 집권후반기에 시도한 익산 경영과 관련있을 텐데요. 당시 익산 경영은 연로했던 무왕 대신 태자인 의자가 왕명을 받들어 추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마 태자로 책봉된 632년 즈음 익산에서 의자가 익산천도관련사업을 지휘했을 것입니다. 귀족들이 의자의 동생 교기를 지지했는데 그 지지세력에는 의자왕의 모후도 합류했으며 상당수의 왕족들도 이에 동참하였습니다. 따라서 의자태자는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자는 이에 바로 맞서지 않고 때를 기다렸고 의자왕이 즉위한 다음 해인 642년 1월 모후가 사망하자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동생 교기와 누이 4명을 섬으로 추방하였습니다. 이것은 의자가 왕위로 오를 때에 심한 견제를 받았다는 것이며 의자왕 입장에서는 왕권강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백제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왕시기의 실리외교를 게속 유지하였습니다. 이전왕인 무왕은 말로만 고구려 원정을 추진하고 실제로는 수나라를 돕지 않습니다. 중국 역사책에 '백제가 간사한 마음으로 고구려와 내통하면서 두 마음을 가졌다'고 나올 정도입니다. 이러한 무왕의 실리 외교는 당나라 때도 유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진세력을 육성하고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고 죄수를 살펴 석방하는 등 민심을 챙겼으니 이는 자신을 지지하는 민심을 모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왕권강화를 발판삼아 신라를 공략합니다. 

642년(의자왕 2)이 되자 의자왕 자신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개 성을 공취한 다음 윤충 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현재의 경남 합천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대야성은 신라로서는 결코 빼앗겨서는 안되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습니다. 대략 오늘날의 경남 일대를 다스리는 하주의 주치소가 두어진 곳이기도 하거니와 신라가 낙동강과 소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교두보이자 전략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당시 조정의 숨은 실력자였던 김춘추(후일의 태종무열왕)의 사위 김품석을 하주 군주로 파견하여 대야성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품석의 보좌관 아찬(阿湌) 서천(西川) 또는 사찬(沙湌) 지삼나(祗彡那)라고 한다. 이 성에 올라가 윤충(允忠)에게 이르기를,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들어 항복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윤충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하였는데, 그대와 우호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밝은 해가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천이 품석 및 여러 장수에게 권하여 성을 나가려고 하였다.’ 『삼국사기』
그러나 사람이 용렬했던 김품석은 부하의 아내를 빼앗는 등 과오를 저질러 민심을 잃었고, 백제 윤충 장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고 원한을 품은 부하가 성문을 열어주기까지 하면서 결국 대야성을 잃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품석은 아내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함께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 대야성에서의 패전은 신라 조야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 왔습니다. 낙동강 서쪽의 모든 영토를 백제에게 빼앗겼고, 곧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신라 사회를 휩쓸었습니다. 사위의 잘못으로 대야성을 잃게 된 김춘추는 다른 귀족들로부터 정치적 책임을 강하게 추궁 당하였으며, 당시 여성의 몸으로 신라의 왕이 되었던 선덕여왕도 “여왕의 통치는 옳지 못하다”는 비판받았습니다. 
이후 신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로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기회로 백제가 고구려에 화친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고구려와 합동작전으로 당항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백제 입장에서는 당나라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라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경산도독에 임명하였으며 644년 가을 9월에 왕이 명하여 김유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치게 하여 크게 이겼습니다. 한편 당시 당나라는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다음 공격 목표를 고구려로 정했습니다. 643년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입공로를 차단한다고 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645년에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 전투가 바로 고구려가 대승한 안시성 전투인데요. 이를 기회로 백제는 반격에 나서 신라의 서부변경을 공략하여 7성을 얻어냈습니다. 이후 김유신 부대가 출전하여 백제와 격렬하게 싸운 것으로 보입니다. 

‘5년(645) 여름 5월에 왕은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해 빼앗으니, 신라가 장군 유신을 보내 침공해왔다.’ 『삼국사기』  
한편 이무렵에 신라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비담(毗曇)이란 자가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그녀를 폐위시키겠다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혼란을 수습하고 신라의 왕이 된 것은 진덕여왕이었고 백제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신라의 국경방비가 소홀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백제는 의직을 필두로 647년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등 세 성을 침공하였습니다. 김유신(金庾信)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이를 방어하였으나 불리하게 되자 부하인 그에게 전세를 호전시킬 임무를 주었습니다. 이에 아들 거진(擧眞), 노복 합절(合節)과 함께 적진에 뛰어들어 분전하다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이를 목격한 신라 병사는 용기를 내어 싸움에 임하니 백제가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자왕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거(腰車) 등 1십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습니다. 백제 의자왕 전반기에는 신라를 압박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데요. 당시 백제의 기세는 신라가 감당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신라는 648년에 나당동맹을 맺었습니다. 의자왕도 당나라에 대한 외교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645년에 벌어진 안시성전투에서의 당나라 패배는 의자왕의 대당외교에 대해 재고하게끔 했습니다. 백제는 무왕 28년 이래로 대신라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당나라가 간섭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에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백제와 신라는 현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랬으니 백제가 신라를 공격할 때면 당나라가 외교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왔습니다. 안시성전투에서 고구려가 당나라군을 격퇴하자 당나라에 대한 외교는 포기하고 고구려와 관계를 강화하기로 합니다. 
‘이때 유신은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였는데, 군사적인 일에는 아예 뜻이 없는 듯 술 마시고 풍류를 즐기며 여러 달을 지냈다. 주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여겨 비방하며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힘이 남아돌아 가히 한번 싸워볼 만한데도 장군께서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유신이 이를 듣고 백성들을 가히 쓸 수 있음을 알고 대왕께 고하여 말하기를, “지금 민심을 살펴보니 가히 큰일을 도모할 만합니다.…(후략)’ 『삼국사기』
648년(진덕여왕 2)김유신은 백제군을 대야성 밖으로 유인해 격파하고,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고 1천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습니다. 백제군은 요차성 등 10성을 장악한 후 좋아하다가 김유신의 신라군에게 당했고 이후 백제는 김유신의 신라군에게 악성(嶽城) 등 12성을 내주었으며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이 차례로 함락당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는 함양과 거창 등 서부경남지역에서 백제의 지배는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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