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 지속적인 신라압박과 왕권강화

2023. 8. 20. 09:3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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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년 백제는 진천과 천안 일대에서 다시 한 번 일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백제의 군사는 좌장 은상이 이끌었습니다.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습니다. 곳곳에서 신라군과 싸웠으며 백제는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이에 신라 쪽에서도 신라 장수 유신, 진춘(陳春),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이 지원했습니다. 이들의 전투는 열흘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투는 전개되었고 은상은 최후의 결전으로 김유신이 주둔하고 있던 도살성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백제군은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는데  이에 김유신이 도살성(道薩城) 아래 자리 잡고 “오늘 백제 사람이 정탐하러 올 것이다. 그러면 누구냐고 묻지 말고 내일 증원병이 온 뒤에 결전한다고 소문만 내어라” 하였습니다. 이를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은 이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백제에 습격을 단행하였고 백제군은 이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도살성 전투는 신라의 승리였지만 여전히 근처의 산성 일부는 백제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아뢰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마침내 방패와 창을 들고 번갈아 쳐들어오니 큰 성과 중요한 진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국토가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약해졌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는다면 곧 〔우리〕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쳐서 빼앗겠습니다. 단지 옛 땅만 얻으면 곧 화해하자고 청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짐은 그의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 651년

하지만 위 기록에서 말하듯 신라는 백제를 상대로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제는 여전히 북쪽으로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으며 그 배경에는 고구려와의 화친도 한 몫했습니다. 반면 백제는 당과의 관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였을 때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빼앗았는데 이 일로 백제와 당나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649년에 당태종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상황을 당분간 관망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당나라가 변화를 겪는 사이 고립되어 있는 신라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느냐 아니면 당나라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백제는 신라와 전쟁을 지속적으로 펼친 바 휴식이 필요했고 이를 계기로 국정과 민생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의자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가 651년에 다시 조공합니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 위해 651년 당나라에 한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했습니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는 백제로 귀국하려는 사신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과 그동안 빼앗아간 신라의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는 대야성을 비롯한 지금의 경상도 서부를 상당히 점령한 상태였고 신라에 이를 순순히 돌려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었으므로 따를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거의 단절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듬해인 652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당과 적대적인 고구려에 좀 더 가까워졌는데 알다시피 당과 고구려는 전면전쟁을 여러 번 벌인 적대관계. 백제가 고구려를 가까이 하면서 당과는 완전하게 척을 진 형태가 되었습니다. 653년에는 백제는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본래 왜국은 백제에 우호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국제적인 상황에 따라 실리적으로 행동을 취해왔습니다. 사실 478년부터 600년까지 일본은 중국 왕조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한 채 백제와의 외교만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중국대륙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왜에 대외정책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백제 일변도에서 다국외교로 변한 것입니다. 왜국은 수나라로 가는 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신라와 관계를 회복했고 수당과의 관계도 점차 늘려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백제와 고구려와의 외교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제-왜 외교관계가 다소 안좋아진 것은 의자왕이 추방한 교기가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교기와 사택지적은 왜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백제-왜 사이의 관계가 좀 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신라가 왜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655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의 33성을 함락하게 됩니다. 이에 당나라는 왜국 사신 하변신마려(河邊臣麻呂)가 일본으로 귀국할 때 파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신라도 급찬(級飡) 미무(彌武)를 왜에 파견하여 대왜군사외교를 전개하였으나 왜는 당과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라는 실망감을 느꼈는지 대왜사절파견을 중지합니다. 이후 왜국은 견당사를 신라의 사절과 함께 가고자 했으나 신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당

나라는 왜국의 견당사를 유폐시키니 왜의 외교는 백제-고구려 쪽으로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이를 기회로 의자왕은 다시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흥 일대에 거주하던 말갈을 끌어들여 공격하여 33성을 탈취하였고 신라 무열왕은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이 전투에 참여한 이후는 당나라의 일전이 불가피한 마당에 신라를 쳐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한편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협공을 한다는 것에 매우 불쾌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흠운을 낭당 대감으로 삼고 백제 땅 양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여 조천성을 공격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은 남진과 북진을 진행하여 신라의 교통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고구려의 협공으로 어려움에 처한 신라지만 당나라로 가는 길이 아예 막힌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길로 가는 길이 멀고 지세가 험난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무열왕은 북계의 30성을 빼앗겨 교통로를 상실하고 한강하류지역에 대해서도 그 위험이 감지되자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655년 3월에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신라도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조천성을 김흠운으로 하여금 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신라군은 패했습니다. 
‘655년 태종무열왕은 백제와 고구려가 막고 있는 변방을 치기 위해 군사를 보냈는데 김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았다.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아가 조천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백제군이 밤을 타고 달려왔다.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화살이 소나기같이 퍼부었다.’ 『삼국사기』
‘15년(655) 봄 2월에 태자궁을 수리하였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망해정(望海亭)을 왕궁 남쪽에 세웠다.’,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식읍(食邑)을 내려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관산성 패배 이후 백제왕은 대성 8족을 포함한 귀족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의자왕 대의 신라 북계 30여 성 격파는 완전한 목표달성은 아니었어도 한강유역을 회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미고 왕의 서자들에게 식읍을 나누어 준 것인데요.  의자왕은 전제왕권 확립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축하여 태자의 정치적 위상을 확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의자왕이 식읍을 내려준 전 것은 의자왕이 왕족 중심 친위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취한 조치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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