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하다

2023. 8. 22. 09: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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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국은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兵器)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럽게 섞여서 서로 연회만 베풀고 있는데,… 그런데 너희 나라는 부인(婦人)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서 도둑을 불러들여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후략)’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643년의 기록입니다. 당시 백제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더불어 백제의 동정도 살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때 당나라가 신라의 여왕(女王) 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 수(隋) 이래 요동과 한반도까지 진출하여 대일통(大一統)을 확장하려는 동북아 전략이 배후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인문은 무열왕 6년(659) 4월에 다시 입당했는데, 세 번째였습니다. 이때 무열왕은 백제 원정을 위한 당나라 군사의 출정을 요청했습니다. 무열왕은 백제에 괴변이 많다는 정보를 확보하고 백제 공격의 결정적 시기로 파악했던 것이고, 이를 인문으로 하여금 당나라에 전하고 군사의 출정을 청했던 것인데, 이는 신라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외교 문제였습니다. 고종은 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곳과 가는 길이 어디가 좋은가를 물었습니다.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자 황제는 기뻐했습니다.
 한편 당나라는 백제 정벌이라는 중요한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일본 사신을 연금하기까지 한 것을 보면, 당나라에서는 659년 윤10월29일 이전에 백제 정벌을 결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 11월에는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총관(神丘道總管), 유백영(劉伯英)을 우이도총관(夷道總管)으로 삼았습니다. 660년 3월 신해. 백제 정벌 위한 당나라 군사 13만 명이 출발하여 6월에 덕물도에 도착했는데, 인문은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管)으로 함께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가 당나라를 연이어 격파하자 당나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고구려에 더욱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해왔습니다. 백제가 신라 북계 30여 성을 장악하면서 백제와 당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반면에 신라는 당나라에 거듭 군사요청을 해왔던 것입니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력 5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게 했습니다. 의자왕은 그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워서 지킬 계획을 물었다. 좌평 의직이 나아가 말했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으나 물에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원조만 믿고서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군사가 불리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날카롭게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싸우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흥수·계백을 모신 사당. 모두 의자왕 시절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을 예견했거나 맞아 싸운 대신들이다. 그런데 의자왕이 사치와 방탕에 빠지지 않고 그들의 충간을 들었다면 세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 양신(良臣)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자 또 다른 신하는 “당나라 군사는 먼 곳에서 왔으므로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신라 군사를 먼저 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의자왕은 어떤 주장을 선택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왕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지금의 전남 장흥읍 일원)에서 귀양살이하는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는데 충신 흥수가 말하기를,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 있어도 10,000명이 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가려내어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이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 성문을 굳게 닫고 단단하게 지키며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이길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물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를 탄현으로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 때문에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럴 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닭장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백제는 공성전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왔습니다. 이는 병력이 분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수도 방비는 허술할 수 있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은 당시 백제의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의자왕이 측근들만 등용하고 환락에 취해있었고 민심이 의자왕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당연합군이 국경의 요새는 놔두고 곧장 사비으로 가서 의자왕을 사로잡는다면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년(660)〕 6월 18일에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1,000리를 이어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삼국사기』
백제는 남천정으로 가는 신라의 동정을 파악했으나 이를 고구려를 치는 것으로 오판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당연합군의 진격에 백제지도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이미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왔습니다.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였고 신라는 5만의 병력이었습니다. 신라군은 죽음을 무릅쓴 백제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4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7월 10일까지 당군과 합류해야 했으므로 백제군을 뒤로 남겨두고 갈 수도 있으나 이는 배후에서 당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신라군은 백제와 상대해야 했고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충천된 신라군이 백제군을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소정방이 동쪽 언덕으로 올라 진을 치고 백제군과 크게 싸웠다. 돛을 달아 바다를 덮고 서로 이어 이르렀다. 적군이 패배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이 되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달아났다. 조수를 만나 올라가는 데 꼬리를 이어 강으로 들어갔다.’ 『구당서』

성충은 당의 침입로를 예상하여 기벌포에 방어망을 구축할 것을 말했으나 이를 무시한 것이 백제에게는 악재였습니다. 당의 수군은 기벌포를 통과하여 사비도성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도착했습니다. 신라군의 합류는 약속보다 하루 늦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소정방은 약속기일이 늦었다고 하여 김문영을 군문에서 참수하고자 했으나 이에 김유신이 반발하여,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소정방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용서하였습니다. 한편 나당연합군은 사비성 공격을 준비하는데 새 한 마리가 영채 위를 날아다니니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합니다. 이에 불길한 징조를 보이자 김유신이 새를 겨누어 없앴다고 하니 그만큼 백제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당연합군은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사비성을 공략하였고 적군이 임박하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의자왕이 떠나자 나당연합군은 둘째 아들 태(泰)가 있는 부소산성을 향했습니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당나라 군사들이 포위를 풀고 가면 자신들이 안위가 걱정된다며 측근들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왕실에서도 내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자 융과 대좌평 천보 등이 함께 항복하였고 이어 부소산성의 왕자 태도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웅진 방령 이식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청하니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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