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 (1)
2023. 8. 23. 10:0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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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의자왕이 항복했지만 모든 백제인이 이에 동조한 것은 아닙니다. 사비성과 일부지역만 항복했을 뿐, 나머지 지역의 성들은 다음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부흥운동의 조짐이 보였고 왕족인 복신이 부흥운동을 참여하면서 부흥운동은 점차 조직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솔계(率系) 관등을 보유하고 있던 지방군장이 참여하였고 여기에 도침같은 승려도 동참했습니다. 복신은 의자왕이 항복하자마자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임존성에 그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3만 여명이나 몰려들었습니다. 계곡이 깊어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한 임존성은 사방 조망에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660년 8월〕 26일에 나당연합군은 임존(任存)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상대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고 합니다. 나당연합군은 임존성 함락에 실패했고 백제부흥군은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과로 200여 성이 호응하고 의자왕이 항복한 지 불과 40여 일만의 일이었습니다. 소정방은 이에 9월 3일 당으로 소환당하고 말았습니다. 소정방은 돌아가면서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의자왕과 왕족, 신료들을 데려갔습니다.
소정방을 대신하여 총사령관이 된 것은 유인원이었고 웅진도호부 체제가 되면서 웅진도독이 되었습니다. 소정방이 돌아가자 백제 부흥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군량 운송 같은 지원을 차단하고자 했고 성내로 진입하여 백제유민을 규합하는가 한편 약탈했으나 나당연합군에게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비성을 제외한 외곽의 대부분 성들은 백제부흥군이 장악했습니다. 당시 경주로 철수하기 위해 보은의 삼년산성에 머물고 있던 태종 무열왕의 군대는 다시 백제땅으로 향하여 이례성을 함락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고구려는 파주의 칠중성을 공략하여 성주 필부를 제거하고 성을 함락했습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군을 상대로 방어를 하는 가운데 무열왕 7년(660) 11월〕 5일에 왕이 계탄(雞灘)을 건너서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는데, 7일째에 이겨서 700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를 통해 사비성에 갇혀 있던 1만 7천의 나당연합군은 부흥운동군의 포위에서 벗어났습니다.
661년 백제부흥운동군은 거점을 임존성으로 정하고 다시 사비성을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유인원이 군사 1천 명을 출전시켰으나 성문을 나서다가 부흥운동군에게 격파당했습니다. 이에 당 고종은 유인궤를 보내 유인원을 구하도록 했습니다. 661년 유인궤는 웅진입구에서 부흥운동군을 맞닥뜨렸으며 신라의 도움을 받아 상륙했습니다. 백제부흥군은 목책 2곳을 세우고 나당연합군에게 저항했으나 막지 못하고 목책 안으로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웅진강에서 단교(丹橋)를 놓고 나당연합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흥군은 사비성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부흥운동군은 자칭 영군장군이라고 칭한 도침을 중심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상잠장군이라 칭한 복신을 중심으로 백제유민들이 모여들어 세력이 커졌습니다.
무열왕의 명을 받든 장수 품일은 백제부흥군에 포위된 사비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신라군은 두량윤성을 공략하고자 했는데 신라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부흥운동군이 들이닥쳐 신라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이후로도 신라군은 두량윤성을 공격했으나 한달이 넘도록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신라군은 식량이 떨어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후퇴하면서 백제군의 견제도 받았습니다.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 군사가 맨 뒤에 가는 중이었는데 빈골양(賓骨壤)에서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였으며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한편 신라의 부대 상주와 낭당(郞幢)의 부대는 각산에서 백제부흥운동군을 상대하여 2천 여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연이은 어려움과 패배 속에 무열왕은 군사를 더욱 증원하였습니다. 당시 백제부흥운동군의 사기가 꽤나 올라있었습니다. 당나라로부터 사자가 왔는데 바깥에 두고는 사자의 관직이 낮다며 자신도 일국의 대장인데 스스로 참견함은 합당하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고구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을 돕지 않을 수 없었고 660년 10월에는 칠중성을 공격한 데 이어 661년 5월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靺鞨)의 장군 생해(生偕)가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습니다. 아마 백제의 부흥운동이 진압되면 다음은 고구려로 향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신라 무열왕은 김흠(金欽) 장군을 보내어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유인궤를 구하도록 했습니다. 661년 2월 유인원은 성문에서 1천여명의 군사를 잃은 후 어려움에 봉착해 계속 신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신라 내에 전염병이 도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파견된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패배시키니 흠이 갈령도(葛嶺道)로 도망하여 돌아갔으며,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복신은 이에 웅진성을 둘러싸게 되니 웅진성을 제외한 대부분 백제지역을 회복하였습니다.
한편 복신은 왜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부여 풍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왜는 받아들여 군사 5천 여명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여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백제부흥운동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는 991년 9월 쯤으로 보이며 왜는 부여풍이 즉위하자 백제왕이라 칭했습니다. 부흥군은 주류성을 왕도로 하고 국가를 재건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에 많은 부흥군이 호응했습니다. 당시 신라를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백제부흥운동이 심상치 않으니 먼저 옹산성을 공략하기로 합니다. 백제부흥운동군은 옹산성과 우술성을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신라군은 661년 9월 25일에 옹산성을 포위하였고 27일에는 목책을 불지르고 수 천명을 베어죽입니다. 이에 백제부흥운동군은 항복하였습니다. 661년 9월 상주총관(上州摠管) 품일(品日)이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太守) 대당(大幢)과 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우술성(雨述城)註 006을 공격하여 1,000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항복한 조복과 파가에게는 급찬이라는 벼슬이 주어졌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지던 나당연합군의 고구려원정은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백제에게 나라를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당시 당 고종은 웅진성에 있는 유인궤에게 신라로 철군하든지 아니면 본국으로 회군을 명할 정도였고 백제부흥군은 웅진성을 포위하여 압박하였고 이에 많은 당 군사들은 회군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에 백제부흥군도 웅진부성에 고립된 유인궤에게 물러가면 추격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유인궤는 고종의 철군명령에 계속 남을 것을 이야기했고 이에 대다수의 군사들이 따랐다고 합니다.
백제부흥운동군은 당이 설치한 5도독부를 의미없는 것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때 이루어진 난당연합군의 고구려공략으로 백제부흥운동 진압에 힘을 쏟을 수 없었습니다. 662년 7월부터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즈음 백제부흥운동지도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부여 풍이 복신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이를 기회로 나당연합군은 662년 7월에 웅진 동쪽의 백제부흥운동군을 격파하고 지라성, 급윤성, 대산책, 사정책 등을 함락시켰습니다. 662년 8월에는 진현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이에 백제부흥운동군은 내지산성으로 옮겨가 진을 치고 저항하였으나 이것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격파당했습니다. 이후 신라군은 거열성을 함락하고 함안과 산청, 진주, 하동 지역에 남아있는 부흥운동군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서부경남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거물성과 사평성을 함락하였고 신라군은 남원을 거쳐 북상하여 논산에 위치한 매화산성을 공격하여 1070 명을 참수합니다. 신라가 웅진동쪽을 장악할 즈음 마한계승의식이 많이 남아있던 전남에서는 백제부흥운동의 열기가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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