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유민출신 당장수 사타충의

2023. 8. 25. 10: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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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충의는 백제 유민출신의 당나라 장군으로 출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돌궐의 사타(沙陀) 계열이 아닌가 의심받았습니다. 하지만 《문원영화》에서 그의 출신을 삼한구족(三韓舊族), 즉 한국계 유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沙) 가문 출신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택씨는 백제의 명문귀족으로 특히 사비부여시기에는 8대 귀족 가문 중에서도 첫째 가는 집안이었습니다. 
당으로 간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이 다 그렇듯 사타충의의 출생연도는 불확실합니다. 다만 당으로 이주한 사택 씨중에는 사타상여와 사타천복이 있으며 사타충의는 7세기말에서 8세기 초에 요직에 있어 전쟁을 수행하니 그가 20세를 전후하여 백제의 멸망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제 유민으로서 당나라에서도 활약한 것은 아마 그의 가문 사택씨가 당에 협조적이었을 것이며 무신으로서의 그의 재능과 그의 가문에 대한 배려도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충의는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지어진 이름이거나 혹은 당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개명할 수도 있는데요. 당나라 장수로 그가 상대한 것은 돌궐이었습니다. 카프간은 당서(唐書)에 묵철(默啜)로 알려져 있으며 돌궐사에서 위대한 정복자로 기억될 만큼 후돌궐 제국의 형성과 발전에 주요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위가 고구려 유민 출신 고문간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몽골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고구려 유민 집단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였는데, 고문간이 이끌던 유민 집단은 당시 몽골에서 세력이 컸던 돌궐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카프간의 사위가 되며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8세기 초에 돌궐은 외부로는 당나라의 침입에, 내부로는 잦은 반란으로 인한 분열과 권력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문간은 이대로 돌궐에 의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715년에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카프간 합한이 피살되기 1년 전이었습니다. 카프간이 이끄는 돌궐은 당나라에게 위협적이었는데 카프간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측천무후를 기쁘게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696년에는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영주를 점령한 이들은 당나라 왕효걸 부대를 상대로 승리하여 당나라에 위협을 주었습니다.  697년 여름 5월 8일 사타충의는 우무위위장군으로 있다가 무의종, 하가밀, 누사덕 등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도록 명을 받아 전군총관이 되어 군사 20만을 거느렸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손만영의 군대를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이를 깬 것은 돌궐의 카프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카프간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698년 카프간이 당나라의 변경인 하북성 북부를 공략하여 어지러움에 빠뜨렸습니다. 여기에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이 진행되었습니다. 카프간 합한의 부대가 규주와 단주 등지로 쳐들어왔습니다. 우무위위장군 사타충의는 천병서도전군총관이 되어 천병중도대총관인 무중규와 함께 30만 군대를 이끌고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돌궐 부대는 8, 9만의 남녀를 생매장하였고 회군하면서 엄청난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하북도전군총관 사타상여도 후군총관 이다조와 함께 출전하였으나 회군하는 적을 추격하여 바라보기만 하였고 감히 돌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당-돌궐 간의 싸움에는 백제 유민 사타충의 고구려 유민 고문간과 더불어 백제 유민으로 생각되는 부여문선과 돌궐부대에는 고구려 출신의 고공의도 있었습니다. 당나라 변경에서 일어나는 당나라와 돌궐 간의 전투에 백제유민가 고구려 유민도 껴있던 것입니다. 706년 12월 명사현 전투에서 돌궐군과 싸우지만 3만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돌궐 부대는 운주, 호주 등을 휩쓸며 약탈했는데 패했음에도 사타충의에게 그 책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707년에 묵철가한(카프간)에 대해 돌궐을 평정하는 대책을 올리라고 할 때 노보는 사타충의에 대해 용감한 장군의 재목이기는 하지만 본래 큰일을 맡기에는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사타충의가 먼저 도망간 점과 전군이 패한 점에 대해 당 중종에 고하였는데요. 그럼에도 중종은 노보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당중종의 태자 이중준이 황후 위씨를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중준은 절민 태자로 706년 황태자가 되었는데요. 그의 곁에는 비서감 양교와 태상경 무숭훈이 있었습니다. 한편 죽은 측천무후의 생질로 무삼사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절민태자를 불편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무삼사는 황제의 자리는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내심 시대하던 사람으로 위황후와 간통하는 사이였습니다. 한편 무삼사의 아들인 무숭훈은 위황후의 소생인 안락공주를 처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주에게 태자를 업신여기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태자가 실권자인 위황후의 소생이 아니므로 항상 그를 종놈으로 부르게 했으며 공주에게 태자가 ‘왕’이 되는 것을 폐하도록 요청하고 공주 스스로는 황태녀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태자가 분노해  이다조, 이사충, 이승황, 독고의 등과 함께 우림천기병을 이끌었고 사타충의도 동참하였습니다. 이들은 무삼사, 무승훈 등을 죽이고 상관첩여를 공격하려 한 것입니다. 태자의 부대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를 찾았습니다. 당시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이미 빠져나가 중종이 피신하여 있는 현무문에 와 있었습니다. 이다조가 이끈 태자의 병력은 달려갔으나 궁문으로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현무문 문루 난간에 몸을 기대던 중종은 이다조가 이끌고 온 ‘천기’를 보고는 귀순하여 이다조 등을 벤다면 부귀를 보장하겠다고 말하니 이후에 이들의 역습에 사타충의도 쓰러졌습니다. 
현대에도 백제유민과 관련된 행사가 시행되고 있는데요. 바로 백제영산대제입니다. 백제영산대재의 유래는 673년 백제 유민들이 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국보 제106호) 등 8개의 석불비상을 조성해 비암사를 짓고 시납해 백제국왕과 대신, 칠세 부모를 위한 재를 올린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제영산대재는 백제의 역대 왕과 대신을 비롯해 백제부흥운동을 하다 숨진 혼령을 불교 전통의 영산작법을 통해 위로하는 행사인 것입니다. 이곳에는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이 있습니다. 
‘계유년 4월○일에 공경되이 발원하여…국왕, 대신, 칠세부모, 모든 중생을 위하여 절을 짓는다.…계유년 5월15일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한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명문」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여기에는 발원한 사람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전씨를 비롯하여 달솔(達率) 신차원, 진무 대사(大舍), 목○ 대사(大舍), 상차 내말(乃末) 등이 있습니다. 달솔이 백제의 관직인 반면 대사나 내말은 신라의 관직이라는 데 있는 것이 특징인데요. 학계는 ‘계유년’을 일반적으로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으로 봅니다. 671년 신라가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오늘날의 부여인 사비에서 몰아내자 당나라의 웅진도독이었던 의자왕의 아들 융(隆)도 당나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후 신라는 사비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신라는 백제의 옛 땅에 살던 사람들이 당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는데, 673년 백제 인사들에게 신라의 관직을 준 것도 유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취한 조치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유명 삼존석상에 나타난 ‘대사’나 ‘내말’은 불만스럽지만 회유책에 순응해가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내린 것이고 ‘달솔’ 신차원에게는 그가 신라 관직을 내켜하지 않자 이러한 관직을 내린 것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불비상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백제의 것으로 분류되는 당시의 시대적 양상을 포함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제가 없어졌다는 현실을 마주해야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은 백제유민들의 심정이 들어가 있는 문화재입니다. 아마 사타충의도 그러한 복잡한 마음으로 당나라에 있었을까요. 그가 태자의 거사에 참여했던 것은 자의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그저 나라 없는 외국인 장수는 당나라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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