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 (2)

2023. 8. 24. 10:0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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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군량미와 물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화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주류성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왜국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는 멀어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제부흥운동군은 근거지를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도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인 주류성의 위치 비정은 그야말로 제각각인데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며 충남 홍성군의 학성산성설이 있는 반면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설,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설 또 전라북도에서는 정읍시의 두승산성설과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 산성설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또 잠시 천도하였던 ‘피성’의 위치 또한 김제 성산설이 있는 반면에 당진 면천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더 큰 악재는 백제부흥운동 지도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여 풍과 복신 사이에 내분이 발생한 것인데 두 사람의 사이는 ‘밖으로는 화합하나 안으로는 마음이 떠나 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복신의 앙심을 더욱 키우게 되었고 부여 풍이 실권이 없으면서 갈등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실(窟室)에 누워 있다가, 부여풍이 문병하러 들어오면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차린 부여풍이 심복들을 데리고 들어가 복신을 반역혐의로 참형하고는 그의 목을 소금물에 절이는 해형(醢刑)에 처합니다.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의 목을 베었으므로 곧장 백제에 들어가 주류를 빼앗을 것을 계획하였다.’ 『일본서기』

백제부흥운동이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당고종은 군대를 바다를 통해 보냈고 문무왕도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주류성을 공격하도록 하며 자신도 직접 출전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주류성으로 올 것으로 보이자 부여 풍도 이에 맞서 고구려와 왜에 군사를 요청하였습니다. 부여 풍이 직접 마중나간 왜의 부대는 662년 3월 2만7천명이 가미쓰케노 기미와카코, 아베노 히라우의 지휘로 백강에 들어왔으며, 663년 8월 왜군 1만여 명이 보충되었고 함선이 1천여 척이나 되었습니다. 
왜가 병력을 지원한 이유는 왜왕권의 경제적인 필요성에서 원인을 찾거나 당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이유, 그리고 대외적인 사태로 말미암아 이를 기회로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의도 등 다양한 이유를 목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당연합군은 백강전투에 앞서 주류성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백강부근에서 나당연합군이 육군과 수군이 만나 주류성을 노리고 있었고 일본수군도 대규모 선단을 꾸려 백강으로 향햇습니다. 
일본의 선발대가 백강으로 들어와 당 수군을 공격했지만 패배했습니다. 탐색전이라 큰 피해는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일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자와 대당의 수군과 대전했다.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 『일본서기』
당은 승기를 잡았으나 더 이상의 전투는 이어지지 않았고 8월 27일에 백강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여러 장군들과 백제의 왕이 ‘기상(氣象)’을 보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왜군의 중군(中軍) 400척이 당 수군이 버티고 있는 백강으로 기수를 돌렸다. 기록을 바탕으로 전투 장면을 그려보자. 왜군이 백강에 들어와 두 번에 걸쳐 싸웠다. 당군은 연승했다. 마지막 세 번째 싸움에서 당 수군의 가운데 대열이 뒤로 물러났다. 왜군 선단은 대오가 흩어진 상태로 전진했다. 물러나면서 만들어진 당 수군 대열 속으로 왜군의 선단이 들어왔다. 왜군이 포위된 장면을 ‘일본서기’는 “대당은 좌우에서 수군을 내어 협격했다‘ 『일본서기』
당시 왜는 나당연합군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밀 조수차를  잘못 판단하여 포위된 상태에서 배를 돌리지 못해 스스로 패배를 자초합니다. 나당연합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왜의 선박들을 둘러싸고 화공을 퍼부었으니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병을 백강 입구에서 만나 4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빛냈고 바닷물도 모두 붉게 됐다.’ 『자치통감』

바다에서 당수군이 왜를 상대할 적에 육상에서는 신라의 기병이 백제부흥운동군을 상대로 승리하였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부여 풍은 고립된 주류성에 들어갈 생각도 못 하고 남은 백제부흥군을 버리고 배를 타고 그대로 고구려로 도주합니다. 그리고 왕을 잃은 여러 성들은 차례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항복했고, 9월 8일 왕을 잃고도 일주일 넘도록 전시수도 주류성을 지키던 충승, 충지도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남아있는 백제군, 왜군을 거느리고 항복합니다. 주류성의 함락에도 임존성에서는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도 시간문제였습니다. 지수신이 지키고 있는 임존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문무왕이 직접 나섰습니다. 신라군은 10월 21일부터 줄기차게 공격했으나 보름동안 함락하지 못했고 철수했습니다. 신라군이 철수하자 당나라는 당나라에 항복한 장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통해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지수신은 성은 물론 처자식까지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습니다. 
‘664) 2월〕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이찬(伊湌) 천존(天存)이 당나라 칙사(勑使) 유인원(劉仁願), 백제 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熊津)에서 함께 맹세하였다.’ 『삼국사기』
이때는 문무왕이 직접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1차 회맹과 관련하여 중국은 국가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하기 위해 고유의 전통방식인 맹서(盟誓)의 의례를 활용하였는데, 신라를 기미주(羈縻州)로 삼아 백제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회맹을 주도했다고 보면서 당나라가 백제고토지배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前)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키고 고향 땅을 보존하게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서 오래도록 이웃 나라가 되어라. 각각 묵은 원한을 없애고 화친을 맺고, 각자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복(藩服)이 될 것이다. …(후략)…’ 『삼국사기』
당 고종은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았고 취리산에서 맹서하는 회맹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백마를 잡아 서로 그 피를 마시게 하니 입술을 벌겋게 되고 단심(丹心)을 신에게 맹서하는 이른 바 삽혈의식을 가졌습니다. 유인궤는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신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백제 멸망 당시 당으로 압송되었던 귀족들을 귀환시켜 다시 요직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부흥운동에 참여했다가 투항한 흑치상지를 웅진성주에 임명합니다. 이러한 것에 신라는 반발했으나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크게 커지게 된 것은 668년 고구려멸망 이후였고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까지 통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나당전쟁 시 당의 지휘를 받던 부여 융이 통치하고 있던 80여 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670년 6월 청마산성 전투에서 5300여 명을 죽이고 이어 사비성을 함락하였습니다. 671년 신라는 백제 옛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673년 임진강 중하류에서 8번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675년 9월 설인귀가 천성을 치자 맞서 싸워 크게 이겼으며 이근행의 부대를 매소성에서, 그리고 설인귀의 부대를 기벌포에서 격파하며 신라는 백제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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