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태비가 된 백제 마지막공주

2023. 11. 2. 08:4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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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 묘지명은 2007년 10월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2004년 중국 산시(陝西)성 고고연구소가 시안 북쪽에 위치한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에서 도굴당한 무덤을 조사하다가 부여태비와 남편인 사괵왕(嗣?K王) 이옹(李邕·678~727)) 부부의 합장묘임을 알려주는 덮개돌(개석·蓋石)과 묘지(지석·誌石) 각 한쌍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중 부여태비의 덮개돌(탁본 사진)은 가로 74㎝, 세로 70㎝, 두께 13㎝이며 전서(篆書)로 3행(行) 9자(字)의 ‘당고괵왕비묘부여지명(唐故?K王妃墓扶餘誌銘)’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었습니다. 지석은 가로 74㎝, 세로 70㎝, 두께 9㎝이며 30행, 1행 31자로 총 831자가 해서(楷書)로 음각돼 있습니다. 덮개돌과 지석 모두 청석(靑石)으로 만들어졌으며 글자체는 날렵하면서도 활달하며 깔끔하고 분명하며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도굴꾼에 의해 지석이 세 덩어리로 깨져 접합부분의 글자 2자가 결실됐습니다.
‘어질고 아름다운 덕을 갖춰 행동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예를 갖췄기 때문에 군자의 집안 사람이라고…찬사를 보낸다. 또 부군이 괵국의 왕이 된 것은 (부여태비가) 집안에서 매우 잘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여태비」 비문 중 
지석에는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증손녀이고, 부여융(扶餘隆)의 손녀이며, 부여덕장(扶餘德璋)의 딸이라는 출자(出自) 및 세계(世系)와 함께 용모와 행실, 남편인 사괵왕 이옹과의 삶, 이거(李巨) 등 5명의 아들을 두었고 개원 26년(738) 8월에 49세를 일기로 죽었다는 사실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부여태비의 남편인 이옹도 당 고조의 증손자여서 백제왕족이 당에서 왕비족이 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국(南國)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

백제 패망(660년) 뒤 중국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의 후예로 당 제후의 왕비가 된 ‘백제의 여인’에 대해 이렇게 묘사되었고 이렇게 묘사된 부여태비의 묘지가 중국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부여태비가 묘지가 발견되었지만 그 역사적인 인물로서는 그 이름이 낯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여라는 명칭이 사뭇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부여이고 백제왕족들이 썼던 성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부여태비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부여라는 성씨를 가졌으면서 당나라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을 말합니다. 
부여태비가 출생한 것은 서기 690년입니다. 이에 30년 앞서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660년 의자왕이 사비성에서 백제의 항복식을 치르며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춘추에게 술을 따르자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부여에 있는 ‘유왕산’은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갈 때 백성이 이 산에 올라 통곡하고, 의자왕은 백성을 위로하며 잘 갔다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한 서글픈 전설이 깃들어져 있는 산입니다. 그리고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전쟁 포로의 후손이자 사라진 백제의 유민으로 부여태비는 당나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부여태비는 백제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당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망국의 자손인 부여태비가 당나라 황족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여태비의 남편은 괵(당나라시대 행정구역의 하나)의 왕이었습니다. 부여태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괵나라 왕인 이옹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옹은 당시 황제의 증손자였습니다. 과거 괵이라 불린 곳은 중국역사상 대대로 번성했던 도시로 현재 중국 허난성 영보라고 합니다. 당나라의 제 1의 수도인장안과 제 2의 수도인 낙양을 잇는 중간지점으로 ‘함곡관만 막으면 물자의 흐름이 끊기고 만다.’는 말이 유래한 장소라고 합니다. 이옹은 괵의 왕으로 당시 이옹은 정치적인 비중이 상당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증손녀인 태비 부여씨의 묘지는 상하 두 짝이 한벌을 이루고 있다. 전서체로 적은 것(사진 왼쪽)이 위쪽, 문장을 적은 것(오른쪽)은 아래쪽 묘지(墓誌)에 해당한다.

부여태비는 백제왕실의 후손으로 망국의 유민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부여태비가 당황실의 인척이 된 것은 그러한 생각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당황실의 종실인 사괵왕 이옹이 백제왕족의 딸 부여태비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들의 집안수준이 비슷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제는 멸망하고 나서도 당나라에서는 왕족의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를 팔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척박한 곳으로 옮겨져 개간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으니 백제유민들도 그러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여태비의 삶은 그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는 망했지만 그는 황족의 결혼상대자로 낙점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라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공주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당나라는 백제유민들을 끌고 와서는 각지에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하고 9년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건안고성이라고 하는 고구려인들이 세운 성에 백제유민들을 한 데 모여 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백제유민에 대한 정책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의자왕의 장자인 부여융으로 하여금 의자왕의 뒤를 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의자왕처럼 대방군왕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왕위를 승계한 부여융은 대방군왕, 즉  백제의 왕으로 건안고성을 통치했습니다. 『구당서』에도 건안고성을 백제라고 부르니 당나라 안에서 백제가 부활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데에는 백제 유민으로 당대 최고의 무장이 활약한 흑치상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흑치상지는 680년, 3만 명의 토번군대를 3000명의 군사로 이끌고 나가 막아내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토번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던 당나라에게 백제유민들이 힘을 보탠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태비가 이옹과 결혼하는 데에는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까. 이옹은 부여태비와 결혼하기 전에 숭국부인과 결혼했습니다. 숭국 부인은 당황제의 중종의 부인인 위황후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이옹은 중종의 아내인 위황후 여동생인 숭국부인과 혼인하여 권세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황제가 바뀌었습니다. 정권교체를 위한 피바람이 분 것입니다. 그에 따라 황후의 동생 숭국 부인과 이옹은 숙청대상 1순위가 되었습니다. 이 때 이옹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아내의 목을 직접 베어 바쳤고 이옹은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왕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데 당시 백제인들은 당나라 군부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당나라 고관대작들은 백제 왕족들과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옹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기로 하고 백제의 마지막 공주 22세의 여성에게 청혼하였습니다. 결혼 후 이옹은 다시 괵 지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옹에게 부여태비와의 결혼은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부여태비가 당나라 황족 이옹과 결혼했던 것은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습니다. 당나라에서 백제유민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지만 이전의 백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면서 백제왕족으로 백제유민들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은 부여태비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나라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했던 이유입니다. 백제가 멸망하는 데 왕족으로서 1차적인 책임을 느껴야 했고 국가가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아래 선택된 결혼이었습니다. 부여태비는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낳았고 그 중 맏이가 괵왕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부여왕비에서 왕의 어머니라는 뜻인 부여태비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럼 백제유민들이 모여 살았던 건안고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구당서』에서는 건안고성이 사라졌을 때 백제의 씨가 끊어졌다고 하며 건안고성의 백제는 발해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지 대략 150년 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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