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피습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2023. 11. 8. 09:0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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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01년, 동성왕이 백가에 의해 피습됩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해구에게 시해되고 삼근왕도 즉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이가 바로 동성왕입니다. 고구려의 압박과 더불어 앞선 왕들이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던 지라 동성왕의 불안감은 더했을 것입니다. 개로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 즉 직계가 아닌 방계 왕위계승이었습니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삼국사기』 「동성왕본기」
합영화라는 것은 이삭이 합쳐져 있는 벼를 말합니다. 원래 한 줄기에서 하나의 이삭이 나는 벼인데 또다른 이삭이 같은 줄기에서 나왔다는 것인데요. 국남해인, 나라의 바닷가 사람들이 바쳤다고 합니다. 무진주에 있던 세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데요. 즉, 옹관묘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이제 중앙정치세력에 포함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당시 귀족들은 웅진 천도 이후에도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제압하기 위해 동성왕이 이용한 것은 바로 웅진 부근의 토착세력들입니다. 바로 이들로 하여금 구귀족들을 제어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진세력 등용 후 사비로 자주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왕도의 건설을 구상해 나갔을까요. 이 동성왕은 일본에서 건너왔습니다. 이는 이후에 등극하는 무녕왕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와 일본의 인연은 꽤 깊었는데 아스카베 신사의 제신은 헌재 스사노미코토지만 일본고서에는 무령왕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곤지왕인 것입니다. 그리고 곤지왕의 아들이 바로 동성왕입니다. 그리고 곤지는 해당 지역에 15년간 머물면서 그 일대를 개척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5세기 일본의 야마토정권은 백제와 많은 연관을 가졌는데 이 때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에서 단순히 문물교류차원이 아니라 야마토정권에서 상당한 정치적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하고… 헌데 갑자기 닥쳐온 제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긴 세월을 거상 중에 있게 되었사옵니다.’ -왜 무왕 상표문-
475년에 왕과 태자가 죽었다는 사건은 바로 개로왕 피살사건입니다. 461년에 백제에서 태어난 백제 태자가 중국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상표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따라서 이를 무령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무령왕은 백제왕족이자 야마토 왜왕의 지위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 본국이 위기에 처하자 왕위 계승을 위해 동성왕이 보내졌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동성왕은 왕권강화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습니다. 그는 강한 한성귀족세력에 맞서 신진세력을 키웠습니다. 병관좌평에 임명된 진로, 신진세력 내법좌평 사약사를 남제에 파견합니다. 그리고 동성왕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있었으니 그는 한성시절 이름조차 언급이 안된 웅진세력으로 그가 자리했던 위사좌평은 현재의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자리였습니다.백씨는 웅진세력으로 천도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피습 4년 전인 동성왕 19년 연돌이 병관좌평에 임명됩니다. 연돌과 백가는 왕의 신임을 둘러싸고 경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동성왕 23년 백가는 가림성 성주로 발령납니다. 전략적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수도 웅진에서 보면 변방이었습니다. 사실 백가에게는 지방 좌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프다는 핑계로 가기를 꺼려했으나 동성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왕은 신진세력의 힘이 너무 비대해졌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성왕이 선택한 것은 가림성을 축조하고 백가가 가서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동성왕 피습사건 그 날, 동성왕은 사녕을 나갔습니다. 웅진 북쪽벌판으로 나아갔는데요. 사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성왕은 사비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동성왕은 이곳에 천도지로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사비기반의 귀족은 환영할 일이지만 웅진 기반의 세력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냥하다가 대설을 만난 동성왕은 유숙하게 되었는데 한 자객이 동성왕이 노렸습니다. 이 사람은 가림성 성주 백가가 보낸 자로 그의 칼을 동성왕을 향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왕이 피습을 당한 곳은 가림성 영내였습니다. 결국 이일로 동성왕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의문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은 바로 자객의 고백이었습니다. 자객의 말은 정국은 흔들 수 있는 것으로 만약 자객이 거짓으로 말을 지어낸 것이라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백가는 동성왕 시해 후 정국을 장악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림성에 머물다가 그 이듬해에 무령왕이 즉위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출병하자 바로 항복하고 맙니다. 이 일로 백가의 단독범행으로 동성왕 피습사건을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백가는 왜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쉽게 진압되었을까요. 백가가 자객을 보낸 것은 맞지만 동성왕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대성팔족으로 사, 연, 협, 해, 진, 백, 국, 목씨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중에 해씨와 진씨, 그리고 백씨는 반동성왕세력이 생겼습니다. 이들이 관련되었을까. 11월에 피습당하고 12월에 왕이 죽었다는데 그동안 백가는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일본서기』에서는 동성왕이 무도포악하여 나라사람들이 그를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전에 거사를 계획했을 경우 무령왕을 대안으로 두었을 것인데 즉, 동성왕 시해사건에 무령왕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동성왕세력들을 중심으로 결집했을 것입니다. 반동성왕세력으로 핵심은 바로 한성귀족으로 보는데요. 남래귀족들은 한성의 수복이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동성왕이 사비 천도를 계획했다면 이는 입장차가 분명하니 이 세력들은 거사의 당사자로 백가를 포섭했을 것입니다.
‘21년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려서 상식하고 신하들이 구휼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시해 2년전인 한성지역에 크게 가물어 한성귀족들의 구휼요청을 거부합니다. 이 일로 한산사람이 고구려로 도망하는 자가 2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동성왕은 한산을 수복해야 하기 위한 대고구려전을 피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니까 동서왕은 한성 같은 북방지역에는 소홀하면서 남방지역인 사비지역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동성왕은 공산성 동남쪽에 임류각을 지었습니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대형건물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동성왕은 못을 파고 진귀한 짐승들을 길렀으며 임류각에서 측근정치를 해나간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아마 여기에는 남래귀족, 비대해진 신진세력을 배제한 채 말입니다. 동성왕은 초반에 세력균형을 이루어가며 정치적안정을 꾀했지만 말기에 들면서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임류각을 짓고 놀이에 빠지면서도 질병, 기근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동성왕의 정치에 반동성왕세력들은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림성은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전략상 요충지였습니다. 게다가 백제 멸망당시 당나라 부대는 이를 놔두고 주류성으로 향할 정도로 견고한 성입니다. 그런데 백가는 이런 요새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항복하고 맙니다. 항복은 곧 죽음인데 왜 쉽게 항복했을까. 살 수 있다고 기대했을까요. 백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무령왕이 직접 출병합니다. 따라서 반동성왕 세력은 모든 것을 백가에게 뒤집어씌웠을 것이고 무령왕입장에서도 왕위에 오른 다음에 무령왕과 백가 사이의 정국의 주도권을 두고 싸움을 일어날 수밖에 없을 테니 제거하기로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성왕의 피습사건은 여전히 의문에 싸여있는데요. 무령왕이 동성왕 피습사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추측일 뿐입니다. 이후 무령왕은 수곡성으로 군대를 동원했으며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변한 북방정책은 아마 큰 힌트가 될 것입니다. 또한 백제왕족들도 동성왕에게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유는 동성왕이 신라와 혼인동맹을 펼치면서 왜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이들도 핵심세력에서 배제되어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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