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의 웅진천도와 해구의 국정농단
2023. 11. 11. 09:0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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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은 백제의 제22대 군주로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는 문주왕에 대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가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고 있고 개로왕 대에 상좌평에 있던 사람은 문주였습니다. 상좌평은 왕의 동생이나 왕의 장인이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주왕은 개로왕이 피살당할 즈음 신라에 파견되어 1만 명의 군사지원을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성이 함락되어 많은 왕족들이 제거되었고 그나마 남은 직계가 문주왕이었습니다. 개로왕의 또다른 동생 곤지가 있었으나 그는 왜국에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목협만치나 조미걸취가 있었는데요. 이들의 지지와 더불어 문주가 데리고 온 1만 명의 신라군사가 문주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는 파국을 맞이한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확실하게 백제를 멸망시켰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한성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가 이렇게 철수한 이유는 신라군과 함께 지방에 있던 백제군도 합세하여 저항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을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고 배후에 있는 북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고구려군이 내려오면서 임진강 유역과 한강 이북지역의 성곽을 다 함락하고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개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백제군이 남아있었고 장수왕 역시 이들과의 교전을 피하며 철군하였습니다. 또한 개로왕을 제거하고 국도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혁혁한 전공이었고 백제군 입장에서도 국왕을 포함한 지도부가 망가진 상태에서 철군하는 고구려군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제 입장에서 고구려의 재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그 곳이 바로 금강 이남의 웅진이었습니다.
그렇게 새 도읍지로 웅진에는 북으로 차령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계룡산이 뻗어있으며 금강은 천연의 해자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삼면이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천혜의 요충지이자 금강이 있어 조세의 운반이나 중국이나 왜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적인 조건 외에도 지역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골랐을 것입니다. 왕실입장에서 천도하고자 하는 곳의 토착세력으로부터 정치적 도움을 받고자 했을 것이며 권력가들 입장에서도 자신의 연고지로 왕궁이 옮겨지면 권력을 탄탄히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웅진 지역과 연관성을 갖는 새력으로 목협씨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또한 공주수촌리고분군 그 중 수촌리 4호분에서는 백제의 중앙정부가 세력의 큰 지방의 수장층을 왕이나 후(候)로 삼으면서 하사한 금동관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것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는데요. 수촌리 4호분에서 출토된 것에는 금동관과 중국제 도자기가 있는데 이러한 것은 무덤의 주인이 왕 다음 가는 위상을 지닌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덤군을 조영한 집단은 ‘백(苩)’씨이며 이들은 웅진천도이전부터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였습니다. 아무래도 이 세력가들이 문주왕에게 웅진으로 천도할 것을 강력히 건의한 것을 보고 있는데요. 종래에는 공주 지역에는 토착세력 혹은 중앙과 연계된 집단이 없어서 이곳으로 천도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러한 유물의 발견은 문주왕의 웅진천도가 해당 지역의 강력한 토착세력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문주왕이 웅진으로 오기 전에 어떤 곳이었을까. 이곳은 3세기 중반까지는 마한연맹체의 한 구성국인 감해국이 위치하였습니다. 백제가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병합하고 주변국들을 흡수하는 과정애서 감해국 역시 백제의 영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에 대패하고 왕이 피살되는 과정을 겪으며 도읍을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이 거주할 공간은 없었을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건물들을 활용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궁실을 중수하다는 기록은 신축하고 다시 고친 것이 아니라 문주왕 천도 이전에 있던 건물을 쓰다가 수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공산성이 방어시설로 활용될 수 있는 후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지는 천도라면 왕권약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협만치와 조미걸취(祖彌桀取)가 측근에서 보좌하였는데요. 이와 별개로 왕족부여씨나 해씨, 진씨 같은 기존의 한성귀족출신들은 웅진에 기반한 세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전횡을 일삼은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해구입니다.
476년 8월 해구는 병관좌평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 2월에는 궁실을 중수하였고 아우인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하였습니다.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한 것은 같은 남으로 내려온 귀족들을 배려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곤지를 내신좌평에, 태자에는 장자 삼근을 책봉합니다. 특히 곤지는 개로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들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몇 안되는 혈육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문주왕에게는 큰 힘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 『삼국사기』
사료에 의하면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경우 흑룡이 출현했다고 표현하는데 이를 통해 곤지가 477년 가을 7월에 사망하였고 이를 자연사가 아닌 피살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그 배후로 해구로 보는데요. 특히 그가 병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곤지가 죽은 후 2달 뒤에 문주왕이 피살되었으니 문주왕을 제거하기에 앞서 곤지에 대해 손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후 해구는 마음대로 국정을 주무릅니다. 문주왕에 대해 성품은 부드러우나 결단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전횡을 일삼는 해구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병과좌평 해구가 권력을 오로지하고 법을 문란시켜 임금을 없애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제어하지 못했다.’
문주왕은 가을에 사냥을 나갔다가 궁성을 돌아오지 않고 외부에서 묵었는데 이를 기회로 해구가 도적들로 하여금 문주왕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백제사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문주왕을 시해한 해구는 당시 문주왕의 장자 13세의 삼근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아마 삼근왕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추대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왕을 옹립한 해구는 478년에 돌연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가 실권을 장악했다면 과연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있을까. 이 점에서 근래에는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었습니다. 그가 조정의 중심에 있었다면 왕궁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은 삼근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귀족가문 진씨 가문과 갈등을 일으켰거나 혹은 진씨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반대하는 다른 귀족세력과 대립을 하다가 이를 이기지 못해 벼랑 끝에 몰리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해구의 반란에 도움을 준 사람은 대두성을 기반으로 한 연신이었습니다. 삼근왕은 좌평 진남으로 하여금 병사 2천 명을 주어 토벌하게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에 삼근왕은 덕솔 진로에게 정병 500명을 주었는데 마침내 해구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고 반란에 가담했던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 삼근왕도 사망하게 되었는데 당시 15세의 어린 나이였으니 그를 옹립해준 진씨 귀족의 전횡 속에 스트레스 받다가 사망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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