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패배 뒤에 왕위에 오른 창왕
2024. 1. 3. 19:5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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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사적 제427호 '부여 왕흥사'는 백제의 대표적인 왕실 사찰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목탑 터에서 발견한 '왕흥사지 사리기(보물 제1767호)'에서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정유년(577년) 2월 15일에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리기를 통해 절의 발원자와 창건 연도, 창건 배경 등을 확인, 백제史 연구의 전환점이 되는 등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창왕은 백제 왕으로서 집권한 기간은 45년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미비합니다. 그에 대한 기록으로는 성왕의 맏아들이었다는 것과 죽은 뒤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왕에 대한 기록을 해외에서 찾자면 『일본서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백합야 전투가 그것으로 백제의 태자 부여창의 단기접전(單騎接戰)으로 유명한 전투입니다.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공격을 한 것으로, 고구려 남부 땅에 대한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신라와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553년 10월 20일, 백제의 왕자 부여창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양원왕이 친히 고구려군을 이끌고 내려오게 되었고, 이 두 전력이 마주한 곳은 백합(百合)이라는 이름의 벌판입니다. 당시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백합에서 진을 치고 보루를 쌓아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밤에 고구려군이 백합 벌판으로 당도하여 이들은 고구려군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부여 창이 고구려 장수와 맞닥뜨려 고구려 장수의 목을 따서 창에다 걸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이후 고구려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하여 양원왕과 고구려군을 동성산 위쪽 지역까지 쫒아 보냈다고 합니다.
태자 시절에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창왕이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창이 신하들에게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다고 선언하였다는 충격적인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 신하들은 전에도 생각을 잘못하여 큰 화를 불렀는데 누구의 잘못이라며 질책하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시고 출가하는 것을 그만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창왕이 저지른 지난날의 큰 실수는 바로 태자 시기에 벌인 신라의 전쟁입니다. 당시 백제와 신라의 영국 국경이 만나는 곳에 관산성이 있었고 이 곳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접전은 벌어졌습니다. 이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하류를 차지했으나 신라가 다시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합니다. 백제조정은 신라의 배신에 논쟁을 벌였고 원로대신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말렸지만, 태자였던 창왕은 원로대신들을 질타하며 아버지 성왕의 지지를 얻어 신라와의 전쟁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은 3만 명의 대군을 편성하고 성왕에게 출정을 고했으나 그것이 창과 아버지 성왕의 마지막 대면이었습니다.
총사령관 창의 기습공격으로 백제군은 순식간에 관산성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지원군이 몰려들면서 전투는 밀고 밀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 때 성왕은 창을 격려하기 위해 50명의 기동대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으나 이 첩보가 신라에 입수되었고 성왕은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신라의 노비 출신 장수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성왕의 시신 가운데 몸은 백제 측에 돌려주고 머리의 경주의 북청 계단 아래 묻어 밟고 다니게 했다고 기록도 아울러 전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창왕의 보복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전쟁을 시작한 창왕은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창이 왕위를 비워둔 채, 3년간이나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고 하니 전쟁으로 백제가 받은 충격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참패의 후유증으로 창은 스스로 스님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백제의 겸익(謙益)은 배를 타고 인도에 유학 갔습니다. 526년(성왕 4) 인도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율부를 연구하고 531년 ‘아비담장’과 ‘오부율’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倍達多) 삼장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흥륜사에 있으면서 고승 28인과 함께 ‘오부율’ 72권을 모두 번역했습니다. ‘오부율’이 처음으로 완역되었는데 이는 중국보다 1세기 앞섭니다. 성왕은 백제를 불국토로 만들려는 의지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왕이 겸익을 머물게 한 흥륜사라는 절의 명칭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절의 이름이 불법을 흥하게 해서 세계를 다스린다는 성왕의 꿈이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성왕이라는 이름 또한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약칭입니다. 그리고 전륜성왕은 ‘불법의 바퀴로 온세계를 교화시키고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란 뜻입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보며 창왕도 전륜성왕의 후계자로 꿈을 키워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백제를 불국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했겠지만, 관산성 전투의 패배는 그 꿈을 무너뜨렸습니다.
창왕은 죽은 아들을 위해 사리함을 봉안하고 세운 사리탑은 5층 규모로 거대한 목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리는 원래 석가모니가 죽고 난 뒤 그 몸에서 나왔다는 구슬로 탑은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부처의 무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왕은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인데요. 중국의 한 교수는 사리의 정치적 성격을 언급하면서 부처의 권위를 얻으려는 왕들에 의해 사리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왕은 거대한 목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봉안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리 생각한다면 창왕은 태자 시절에 관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그 사건을 마음의 짐으로 여겨 대신들에게 큰 소리 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한 그의 시기에 거대한 목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적어도 그러한 일은 개인적인 신앙의 일로만 여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시 창왕에 대해 우리가 알만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관산성 전투 이후에 불과 2개월 후인 554년 2월 백제가 신라의 진성을 공격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창왕은 참패 2개월 만에 무리하게 전투를 진행한 느낌도 없지 않으나 주변에도 있을 우려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성 전투의 승리의 목적에는 아버지 성왕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는 결단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전투의 승리 이후 그해 10월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해오자, 백제는 이를 물리쳤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위덕왕은 귀족들을 상대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결국 왕위에 올랐습니다.
567년 창왕은 능산리 사찰을 조성합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잃은 지 13년만의 일입니다. 창왕은 출가할 마음을 접고 잇달아 사찰을 창건합니다. 그리고 사찰 창건의 목적은 죽은 사람의 혼을 달래주고 실추된 왕실의 권위 회복과 정국 안정에 있었을 것입니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사리감은 ‘창왕 13년(567), 왕의 누이(성왕의 딸)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당시 백제 왕실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 창왕은 대외적으로도 어려운 정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능산리 사찰을 세운 567년 9월, 창왕은 중국의 남조국가인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중국 대륙의 북제에도 외교사절단을 보냅니다. 여기서 의이한 것은 웅진으로 수도를 천도한 후 줄곧 남조 국가와 외교를 진행하던 백제가 북제와도 교류를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남북조와 동시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백제 역사상 최초였습니다, 신라에 밀려 가야가 최고되었고, 중국도 북위와 진나라로 양분되어 정세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창왕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이용하여 외교력을 발휘했고, 그것을 디딤돌 삼아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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