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했을까.

2024. 4. 26. 07:1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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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백제 근초고와아 시기에 이미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전체를 병합했다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도 근거는 있습니다. 바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49조, 그러니까 369년의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공황후가 파견한 군사가 비자발,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의 7국을 평정했다. 이어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해진에 이르고 남만 침미다례를 정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초고(근초고왕)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니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스스로 항복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왜군이 단독으로 가야 7국과 이른바 ‘마한’ 침미다례를 정벌하고 나서, 백제군과 연합하여 비리 등 ‘마한’ 잔존 세력마저 평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두고 학자들은 근초고왕 때의 마한을 정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벌의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초고왕 주도의 백제‧왜 연합군의 원정의 결과로 가야 7국이 백제에 종속되었고 마한의 잔존 세력인 침미다례의 정벌과 비리 등의 항복으로 귀결되면서 백제의 영역이 남해안 그리고 낙동강 주류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4세기 마한 병합설은 왜의 응원군이 와서 더불어 경략하였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지만, 근초고왕의 부자가 전남지역에 원정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이것을 주장한 이병도는 군사 활동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보았고, 공략 지역을 전남지역 마한의 잔읍으로, 정복 시기는 신공기 49년(249)에 120년을 더한 근초고왕 24년(369)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군사 활동의 1차 목표로 설정되어 정복된 신라와 가야 7국에 대한 백제 병합은 인정하지 않고, 2차 목표였던 마한 제국만 병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논리적인 측면에서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를 증명할 고고학적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료도 학자들의 자의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 사료 또한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기사로 여기에 사실성 여부에 의문이 생깁니다. 「신공기」 49년은 서기 249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서기 369년 근초고왕대의 사실로 보려면 2주갑, 즉 120년을 더 내려잡아야 합니다. 따라서 일본학계에서마저 해당 연대인 249년의 사료가 아니라 설화이며, 『일본서기』 편찬 당시(720년)의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침미다례' 침략 직전에 나오는 신라 공격과 가야 평정이라는 사료는 이후 '임나일본부설' 및 '정한론' 논리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일본에서마저도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로 더 이상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습니다. 설령 이 기사가 사실이라 해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 시기에 마한을 정복했다는 설에 의문을 들게 하는 유적이 영산강 유역인 나주‧영암‧함평 등지에서 있습니다. 바로 120여 기에 이르는 대형 옹관묘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대형 옹관묘는 이 지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가 충남 서산 ‧보령 등지에서도 옹관묘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묘가 이 곳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옹관묘는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국인 중국‧일본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1963년에는 광주 산창동 유적에서 어린아이들만 묻은 53기의 옹관묘가 나왔습니다. 
  특이할만한 것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대형 옹관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고유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따라 이 지역에 독자적인 토착 세력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옹관묘가 6세기 전반까지 보이므로 그 때까지는 그 세력을 유지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묘는 6세기 중반이 들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백제 계통의 석실분 등의 무덤양식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백제 왕실로부터 관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지역이 이 때부터 백제의 지배 내지는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복암리 3호분을 들 수 있습니다. 복암리 3호분에는 한 봉분 내에 옹관과 석실 그리고 옹관과 석실을 결합한 형식까지 보이는 등 무려 41개에 달하는 다양한 무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이 영산강유역의 분구묘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이유는 하나의 분구 내에 400여년 정도 지속적으로 매장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며 동일 집단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적 또한 중요한 단서인데 96석실묘의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5,7호 석실묘의 관모와 규두대도, 그리고 5호 석실묘의 은제관식입니다. 특히 은제관식과 관모는 백제왕실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지역도 6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백제 왕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암리 석실묘의 주인공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인지 지역 토착세력의 수장인지는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백제는 538년에 사비로 천도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22담로라 하여 모두 자제와 종족에게 분거하게 했다고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백제의 군현은 37군으로 늘어납니다. 
  ‘그 나라는 본래 5부로 나뉘어 모두 37군, 200성에 호구는 76만이었다.’ 『구당서』
  사비 천도 이후 백제는 담로제에서 5부, 5방제로 바뀌었고, 이것은 본래 백제의 영향력 밖에 있던 지역이 백제 안으로 들어온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 새로 들어온 지역이 바로 영산강 유역, 즉 대형 독무덤을 사용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배로 들어간 것은 빨라도 6세기 전반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나의 선조 속고왕(근초고왕)과 귀수왕(근구수왕)의 치세에 안라‧가라‧탁순‧한기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게 되어 우호관계를 두터이 맺게 되었다. 그래서 자제로 삼아 항상 도탑게 지내기를 바랐다.’ 『일본서기』
  백제 성왕이 회고하는 기록으로 이때 자제는 왕실의 자제가 아니라 토착세력의 수장층이라고 합니다. 
  오늘 『일본서기』에 나오는 마한의 소국인 침미다례의 정복 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학계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크게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한 전체에 대한 정복, 둘째가 5읍만 정복한 부분적 정복, 셋째는 해남 지역 마한에 대한 일회성 급습으로 보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왜가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는 '침미다례'는 오늘 해남 백포만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는 왜와 안정적인 교역체계를 갖추고 영산강 유역 마한까지 확대해 가려는 과정에서 해남 백포만 일대에 하나의 거점, 즉 교통로를 확보한 것으로 보는 연구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백제가 해남 백포만 일대에 거점을 확보했다고 한다면, 그 시기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서 보듯 4세기 후반일 것입니다. 
 이 후 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던 탐라는 제주가 아닌 해남·강진 지역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해상 교역의 거점이었던 이곳 세력집단이 일시적이나마 백제에 등을 돌리고 왜 세력에 동조하려는 조짐을 드러냈다면 백제에 바치던 공부(貢賦)가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동성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에 이르자 깜짝 놀란 탐라(해남·강진 지역)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다시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탐라'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그친 것이 아닌,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와 반 백제세력, 그리고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던 왜 세력에 대한 무력시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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