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와 온조는 형제였을까.

2024. 5. 3. 07: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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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와 온조왕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말라 살기에 적당치 않았습니다. 비류는 비류국을 세웠으나 13년 만에 멸망하여 십제에 병합되었다는 이야기가 백제 건국 설화에 대한 요약입니다. 
 한편 문학산 일대의 전설과 민담의 수집을 한 결과 비류와 온조(온조왕)은 삼각산에 올라가 서로 살 곳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으므로 미추홀의 문학산에 성을 쌓고 살게 되었고, 동생인 온조왕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비류가 세운 곳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 적당치 않았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비류는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에 가 보았습니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넓어 사람들이 잘 살고 나라의 기틀이 잡혀 있었습니다. 이에 비류는 의기소침하여 미추홀에 돌아와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비류의 능을 에분(恚墳)[분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 불렀습니다. 비류의 능이 문학산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비류와 그의 동생 온조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에 봉해지자 위협을 느껴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새 국가 건설을 위해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비류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아우인 온조와 결별합니다. 이 과정에서 비류는 고구려에서 함께 남하한 신하들의 간언을 물리침으로써 이들과도 갈라서게 됩니다. 비류를 따르는 신하가 없었다는 것은 장차 미추홀에서의 국가 경영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추홀로 옮겨가 자리를 잡습니다. 비류가 문학산 주변을 근거지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은 미추홀이 한 나라의 도읍지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지리적 여건상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미추홀이 백성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지역으로 묘사된 것은 온전한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으로, 비류가 국가의 경영에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비류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결하며, 그의 백성은 온조의 십제에 흡수됩니다. 비류의 자결과 백성들의 귀의는 온조의 십제가 비류의 미추홀을 흡수·병합하는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문학산성

  비류는 백제 미추홀(彌鄒忽 :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의 인천부근으로 추정됨)에서 일어난 왕족의 시조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溫祚)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함께 비류가 시조라는 이설도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시조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는 미추홀에서, 온조왕는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에서 따로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여 두 집단이 각기 자기 시조를 내세운 결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삼국사기』 등에는 비류집단의 계보는 전하지 않으며, 백제왕들은 모두 온조 계보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류계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존재하였던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건국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기있다기보다 아마 세월이 지나면서 전승되어 온 것으로 그 과정에서 잘못 전해진 부분도 있을 것이고, 시간에 따라 윤색되거나 조작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조가 백제의 시조가 되었든, 비류가 되었든 일맥상통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백제 왕실의 후손들이 고구려에서 내려온 인물을 자신들의 시조로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백제의 시조가 온조냐 비류나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이 둘이 과연 형제인가에 대해 의문이 남기도 합니다. 
  ‘저희 나라는 고구려와 함께 조상이 부여에서 났으므로 선대 때에는 옛 정을 돈독히 하여 지냈다.’ -백제 개로왕이 북위 효문제에게 보낸 외교 문서-‘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백제의 건국 주역은 북쪽에서 남하한 고구려 계통이라 할 수 있으며 보다 넓게 보면 부여족 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가 졸본인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류는 동생 온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미추홀에서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
  비류 전승으로 미루어 볼 때 비류나 온조는 그 성이 해씨였습니다. 고구려에서도 시조 주몽에서 제 5대 모본왕까지는 성이 해씨였다가 방계집단인 태조왕 계통이 새로 왕위를 차지하면서 성을 고씨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전승의 설화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 해부루 계통임을 밝히고 있으므로 비류집단이 온조집단보다 먼저 백제 지역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과연 비류와 온조는 형제일까. 이것은 다른 신화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로 대가야의 건국신화입니다. 
  ‘[고령현은] 본래 대가양국이다. (…) 시조는 이진아시왕인데, 그로부터 도설지왕까지 대략 16대 520년이다. 최치원의 석이정전을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이러한 이야기는 가야연맹의 주도권이 김해 금관국에서 고령 대가야국으로 옮겨간 이후의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주변 연맹국들에게 대가야가 금관가야의 정통성을 계승한 점을 부각시켜 그 주도권을 인정받기 위한 것입니다. 
  백제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류와 온조가 실제 혈연관계라기보다는 비추홀의 비류 세력과 위례성의 온조 세력이 연맹관계를 맺었고 이를 합리화하는 과정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형제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이야기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화에서 비류가 온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굳이 바닷가를 고집한 것입니다. 두 집단이 각기 다른 조건을 가진 곳에 정착했으니 서로 다른 계통이었을 것이고 비류 집단이 미추홀에 정착했다는 것은 그들을 해상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 사서마다 지역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백제의 건국 세력이 한 집단이 아닌 여러 집단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역사서에 따라 건국 시조를 구태, 비류, 온조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그 건국 지역도 달랐습니다. 구태는 대방 고지에서, 비류는 미추홀에서, 온조는 위례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비류와 온조가 형제가 아니라 별개의 집단의 수장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결국 건국 설화를 통해 결국 연맹의 주도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로 비류가 형으로, 온조가 동생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연맹의 주도권이 처음에는 비류에게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류가 죽은 후 비류를 따르던 무리들이 온조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신화의 내용처럼 비류가 살아있을 때 두 집단이 합쳐진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비류 전승의 건국 신화가 현재까지 전해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성장하면서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면서 두 집단은 동등하게 그 세력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온조계 연맹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그 시점에 비류계가 흡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온조의 건국설화가 더 자세하게 기술되었다는 것은 후대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작업의 결과로 전해진 온조전승이 온조를 백제의 건국 주류로 인식되게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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