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국토를 꿈꾼 창왕

2024. 1. 6. 19:5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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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554-598)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 목탑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되었습니다.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재위기간 중 정유년은 577년입니다. 사리함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좌태자는 문헌으로 확인한 백제 창왕의 유일한 아들입니다. 백제의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현존하는 역사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의 역사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일본에서 사찰 아스카데라를 완공하자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사절로 파견되었으며, 특히 그 곳에서 쇼토쿠 태자의 예진(睿眞)을 그려준 일화로 유명합니다. 백제는 국가적인 위기가 있을 때마다 태자는 일본에 보내 일본과의 외교를 강화했습니다. 당시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였고 위덕왕이 재위한 당시의 백제는 선왕인 성왕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 중에 전사하는 바람에 상당한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온 지 1년 후 위덕왕이 승하하고 왕위는 아좌태자가 아닌 동생 혜왕에게로 승계되었습니다. 특히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 공교롭게도 위덕왕이 병환으로 몸져 누웠고 따라서 권력의 공백을 메운 것은 왕의 동생이자 부여계인 혜왕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좌태자에 대한 기록도 일본에 건너간 이후 위덕왕 승하 시점부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혜왕이 위덕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덕왕이 나이가 많았으나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정사를 돌보았고 백제의 역사에서 수많은 왕들이 정변에 의해 살해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위덕왕도 암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좌태자의 이름은 일본의 고문서 『비전국지』의 「이나사 신사」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창왕의 이름과 함께 창왕의 아버지인 성왕과 아좌의 이름까지 삼대에 걸쳐 적혀 있습니다. 이나사신사는 『일본삼대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신사인데요. 이나사 신사의 역사를 기록한 목판에 의하면, 신사에는 창왕의 아버지 성왕과 아좌가 신으로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 목판에는 “아버지 성왕과 어머니의 영혼을 소중하게 섬기는 아좌의 효심에 감복해 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아좌가 창왕의 아들이 아닌 성왕의 아들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아좌태자가 위덕왕의 동생이라는 설은 보통 신빙성이 낮다고 여겨집니다. 고령의 나이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좌태자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도중 갑자기 모습이 사라져서 611년 일본에 귀부하는 임성태자와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597년입니다. 창왕이 사리를 봉안하고 20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러면 사리함 명문 속의 죽은 왕자는 아좌 태자일 수 없고 창왕에게 다른 왕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8년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쳐서 약탈하였다. 신라 군사가 나가 쳐서 이기니 죽은 자차 1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대패 이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신라와의 재대결에서 승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벌어진 것이 바로 561년의 전투, 창왕의 지시로 백제가 신라를 변경지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아마 그때 창왕의 아들이 전투를 지휘하지 않았을까요. 창왕이 태자 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1천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한 전투에서 위덕왕의 왕자들도 전사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고 사리함 명문에 적혀 있는 ‘왕자의 죽음’은 당시 목숨을 잃은 왕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리함 명문의 나온 신기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리 두 알을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세 알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기록은 사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리함의 봉안 날짜가 2월 15일인데 이는 부처의 열반일로 고려 전기까지는 연등회를 개최하는 국가기념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화위삼(神化爲三)’은 종교적 신비함을 강조하여 사리공양하는 것이 신성한 작업임을 만방에 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굴했을 때, 왕흥사 사리함에는 사리 대신 맑은 물만 고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양이온 검사에서 사리함 속 고인 물이 사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사리함 속 사리의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입니다. 


  사리함 속 사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예로부터 사리에 대한 신비한 기술은 중국에서도 기록해 왔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둔황석굴에서는 사리를 공양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에서 오색의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고승전』에도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병 위로 뻗쳐 나왔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국가에서 사리나 불상을 통해 신이한 현상을 보여주어 백성들을 포섭하는 일들은 흔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 왕실의 사리 봉안은 신앙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일까. 아마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역시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요. 전쟁터에서 전몰한 왕자를 위해 사리탑을 조성한다면 백제 백성들도 그 마음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577년 2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하여 민심을 모으는가 한편 백제도 신라를 응징할 것이라는 다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8개월 뒤 백제군은 신라를 침략하였는데 비봉산을 넘어 선산 일대까지 진출합니다. 위덕왕 9년(562년)에 신라 서쪽 변경을 약탈하였던 것과는 달리 신라 주군을 침략한 이 전쟁에 대해 기록이 남아 있고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일선 쪽 전투 기록에서는 사상자가 3700명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꽤 큰 전투였을 것입니다. 창왕은 이 전투에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사리를 봉안하면서 ‘신화위삼’의 기적을 보이며 부처가 백제를 돕고 있다는 것을 백제 만방에 알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창왕의 시호는 위덕왕입니다. 불교에서 위덕명왕은 중생의 번뇌를 없애주는 오대명왕 중 한 명입니다. 따라서 위덕왕도 백제를 불국토로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일본 도시 오사카에 백제 창왕이 파견한 사절단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법륭사에 백제 관음상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위덕왕이 부왕은 연모해서 나타난 존상이 곧 구세관음상이다.’ 『성예초』
  사람의 모습을 한 구세관음상의 얼굴은 바로 창왕의 아버지인 성왕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왕은 백제를 중흥시키기 위해 불교를 구심점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처음으로 왜에 불교분명을 전하면서 ‘만고의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이라고 했으니 창왕이 성왕이 뜻을 이어받아 백제는 물론 일본까지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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