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백제 동성왕

2023. 11. 14. 09:0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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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삼근왕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면 후계자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삼근왕의 연령을 볼 때 그에게는 아들이 없거나 있다고 하여도 지극히 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24대 동성왕입니다. 따라서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사마와 모대가 그 후보가 되었고 모대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동성왕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 역사서와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여대(餘大)'로 나옵니다. 동성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남제서』에는 동성왕의 조부의 작호를 받은 것으로 이해했으며 『남제서』를 인용한 『책부원귀』에서도 망조부의 작호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대 동성왕은 모도의 손자가 됩니다. 반면 『양서』에서는 모도는 개로왕의 아들이고 모대는 모도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책봉호를 줄 때 대개 전왕의 작호를 고려하여 준다는 것을 감안,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모대는 곤지의 아들이고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요.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모도가 왕이 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모도를 문주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동생이라고 하고 있으며 따라서 곤지의 형인 문주도 개로왕의 동생인 것입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곤지가 동성왕의 아버지로 나오므로 모대 즉 동성왕은 개로왕의 손자가 아니라 조카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곤지는 일본에 가 있으면서 다섯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곤지는 현지에서 일본인 유력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았을 것입니다. 왕족인 그에게 걸맞는 신분에 여성을 재왜백제인 중에는 찾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개로왕의 피살사건과 더불어 삼근왕이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여 그 다음 왕을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 중에 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조정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내에 있어 비교적 세상물정이 밝았던 18세의 사마보다는 왜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다온 나이 어린 모대가 더 왕으로서는 제격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동성왕의 등극에는 왕으로서의 자질보다는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진씨 귀족의 구미에 맞는 인물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또한 왜에 있다가 귀국한 동성왕은 자연스레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당시 실권자 진로에게 더욱 정치적으로 의탁할 것입니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동성왕의 등극은 왜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동성왕은 재위 4년 482년에 진로를 병관좌평에 임명합니다. 

『일본서기』에는 곤지에 대해 곤지왕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곤지왕자’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곤지는 이전에 해구세력에 의해 제거되었고 곤지는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왕은 아니지만 ‘왕’칭호가 붙은 유일한 백제인이 된 것인데요. 동성왕은 비록 진로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 곤지에 대해 어떻게 추숭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곤지왕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대체적으로 곤지에 대해서 어떻게 인지하고 있을까. 
461년(개로왕7) 곤지는 왜와 협력해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개로왕의 계획에 따라 왜로 파견되어 가와치(河內)의 아스카(飛鳥)에 정착합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큰 혼란을 겪던 상황에서 곤지는 문주왕의 부름을 받고 웅진으로 귀국해 477년(문주왕3) 내신좌평에 임명되었습니다. 내신좌평에 임명된 곤지는 자신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웅진백제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귀국한 지 3달 만에 왕권을 위협하던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곤지가 국내외에서 쌓은 정치·경제적 기반은 삼근왕에 이어 두 아들인 동성왕과 무령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습니다. 동성왕과 무령왕은 곤지가 그랬던 것처럼 웅진백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백제의 중흥을 대내외에 천명한 521년(무령왕 21) 무령왕의 '누파구려 갱위강국' 선포로 이어진 것인데요. 곤지가 정착했던 일본 아스카에는 아스카베(飛鳥戶神社) 신사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곤지를 비조대신(아스카의 큰 신)으로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이자 조상신으로 숭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곤지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사냥을 즐겨했으며 활솜씨가 좋았다고 합니다. 사냥을 통해 해당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늘려나갔고 이를 통해 왕실의 물적자원을 채운 것입니다. 왕이 사냥한 장소는 더 이상 지방호족의 사유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왕권강화의 일환이었을 텐데요. 동성왕에게 그러한 일이 분명 시급했지만 그것은 귀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갈의 공격을 받은 한산성 주변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궁궐과 성벽을 중수하고 왕성 안에 임류각을 축조했으며, 제민천에 웅진교(지금의 대통교)를 가설해 백성들을 홍수로부터 구제하고 왕도를 확장시키는 등 오늘날과 같은 공주 원도심의 풍경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외교상으로 두드러진 성과는 신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추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살수벌판에서 고구려와 싸움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견아성은 금새 고구려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는데요. 당시 동성왕이 보낸 3천의 백제 군대가 고구려 군사들을 축출시킵니다. 한편 495년에 고구려에게 치양성(雉壤城)을 공격받았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신라에서는 장군 덕지가 군대를 이끌고 도우러왔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물러갔습니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는 공동전선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하였습니다. 백제와 신라 동맹군의 승리는 양국으로 하려금 고구려의 공세에 대응하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절감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 사이의 신뢰는 매우 돈독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신라에 대한 백제의 경계가 느슨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입에 대비한 것입니다. 동성왕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국제적으로 그 이치가 밝았던 군주였습니다. 
483년 즉, 동성왕이 왕이 된지 5년이 지날 무렵, 한성백제기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성씨들이 등장합니다. 동성왕 6년의 내법좌평 사약사. 8년의 위사좌평 백가, 12년의 달솔 연돌, 20년의 한솔 비타 그리고 이후로도 나왔습니다. 또한 이와 맞물리는 것은 개로왕이 송에 보낸 국서에 비해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에는 왕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점입니다. 아마 웅진천도로 인해 많은 왕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금강유역권을 기반으로 하는 신진세력들이 부상하고 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한성에 근거지를 두었던 귀족들은 고구려의 침공으로 그 경제적 기반을 잃어 힘이 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천도초기에는 이들 중 반란도 일으켜 자체적으로 세력약화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성왕 입장에서도 기존의 남래귀족들을 견제할 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동성왕은 오랫동안 왜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그 지지기반도 약했기에 금강유역권의 세력들에게 손을 내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신진세력의 힘이 예상보다 커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동성왕은 이들에게도 견제신호를 보냈습니다, 당시 신진세력의 대표주자로 위사좌평 백가가 있었는데 가림성을 축조하여 그를 성주로 보내려 한 것입니다. 백가입장에서는 정치일선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프다는 이유로 버텼으나 기어이 내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신진세력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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