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멸망의 징후

2023. 8. 21. 09:3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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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는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으니 형벌이 미치는 곳은 오직 충량에 있었다’
이 문장은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은고는 백제 의자왕의 처로 역사상 유일하게 기록된 의자왕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횡탈하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자초했다.’ 『일본서기』
소정방의 글이나 『일본서기』를 기록이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보아 대부인 은고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고를 지지하는 집단은 신진귀족세력이었고 은고는 의자왕에게 받은 총애를 바탕으로 자신이 낳은 효로 하여금 태자로 교체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의자왕이 자만도 백제 멸망의 한 몫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계속된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이것이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서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요. 즉, 의자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심하다가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는지 아니면 다른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 결국 백제가 망하게 되면서 그 책임을 다 의자왕이 뒤집어쓴 것인 아닌지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가령 백제의 의자왕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세력은 간신배로 기록되고 의자왕 시기 전반기에 같이 도모하다가 나중에 의자왕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실권에서 배제되자 맞선 세력은 충신으로 기록되어 의자왕을 충신을 저버린 왕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자왕도 다른 왕과 마찬가지로 친위세력을 구축합니다. 계백과 흑치상지의 등용, 그리고 41명의 서자들을 좌평으로 삼은 것 등입니다. 그리고 은고와 더불어 그 지지세력을 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태자를 융에서 효로 바꾸면서 의자왕은 자신의 집권체제를 공고히 가져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소외되는 귀족세력의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사건으로 터진 것이 정변이라는 형태입니다. 이 일을 기록한 것은 『일본서기』로 642년의 일이지만 정황상 655년에 일로 보기도 하는데요. 의자왕은 무왕의 왕비이자 실권자였던 계모가 세상을 뜬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합니다. 이 계모에 대해서는 사탁씨 왕후로 보고 있으며 이유는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무왕보다 늦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쫓겨난 교기는 의자왕의 아들이 아닌 조카로 보고 있으며  왕족뿐 아니라 계모의 친정세력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그 화가 미쳤을 것입니다. 의자왕은 무왕 말년에 사탁씨 왕후와 그 측근에 의한 정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통해 의자왕은 귀족세력을 배제한 독주체제를 학립하게 된 것입니다. 
성충은 의자왕 초기에 집권을 돕기 위해 보좌한 사람입니다. 어린 의자왕이 백제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 신라는 김유신을 앞세워 가잠성(괴산)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자 성충을 꾀를 내어 가잠성 성주 계백을 믿고 군대를 대야성(합천)으로 보냈습니다. 과연 계백은 신라의 정예군을 맞아 조금도 밀리지 않았고, 덕분에 그 사이 백제군은 중요한 요새였던 대야성을 함락하고 그 기세를 몰아 신라의 성 40개를 빼앗았습니다. 놀란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를 눈치 챈 성충은 연개소문을 설득해 고구려와 동맹(여·제 동맹)을 맺음으로써 신라를 고립시켰습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했으니,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머지않아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쓸 때는 반드시 높은 곳에서 적을 맞아야 지킬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면, 땅으로는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물로는 지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성충은 옥중에서도 신라와 당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라와 당의 침입에 대해 성충과 의자왕의 입장이 달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자왕이 궁인들과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 간언하였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고 하는데 달리 말하면 당시 의자왕은 신라 북계 30여 성을 공략한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고 그 긴장감이 풀어져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데요. 따라서 성충은 의자왕의 강격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당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흥수란 신하가 있었고 그 역시 성충의 의견을 따랐는데 그 일로 흥수은 백제 고마지지현으로 유배당했습니다. 
‘6년(659) 여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백제를〕 치려고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당시 이자왕은 독산성 등을 공격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김인문을 보내 나당연합을 이루어냅니다. 당시 당나라는 658년과 659년에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성과는 없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배후지에 근거지를 두고 공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기로 합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즈음 흉흉한 일이 일어납니다. 

‘19년(659)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혹은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거나 ‘20년(660년)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천(백마강 / 금강)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그리고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수도의 시민들이 이유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등 이외에도 안좋은 역사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안좋은 기사들이 승리자의 관점에서 상대 국가는 이러하니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써넣을 수 있으나 일부는 아주 허황된 기사는 아닐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으며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는 기록은 고래의 출현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서해의 물고기들이 나와죽었다는 것은 폐사한 동물일 것이며 (백마강 / 금강)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은 것은 적조현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659년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단 것은 그 태자궁의 주인인 백제 말기의 태자 즉 부여효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것을 돌려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월에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어떤 배가 홍수를 따라 노를 저어 절 문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 사슴처럼 생긴 개 한 마리가 서쪽에서 사비하 기슭으로 오더니 왕궁을 향하여 짖다가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왕도의 여러 개가 길가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더니 얼마 뒤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왕궁 안으로 들어 와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라고 크게 외치고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서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세 자[三尺] 남짓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게 됩니다.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아직 차지 않았으면 점점 차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니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차츰 미약하게 된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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