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여러 번 공격한 백제 무왕
2023. 8. 18. 09:2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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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은 즉위 2년 만인 602년 8월, 군사를 이끌고 아막산성을 포위합니다. 무왕이 아막산성을 공격한 이유는 이곳을 빼앗아 남원-함양선을 돌파하여 옛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신라 증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을 보내 백제군의 공격에 맞서게 하여 백제군을 퇴각시키고 아막산성을 주성으로 하여 소타(小陀),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등 4개의 성을 쌓아 아막성의 부성으로 삼았는데 아막산성을 모산성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라는 이렇게 아막성과 소타성을 연결하여 백제가 남원 방면에서 가야로 진출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한편 무왕은 신라에게 패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좌평 해수장군으로 하여금 다시 4성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과 맞서 싸우자 전세가 불리해진 백제군은 천산 서쪽의 소택지로 퇴각하며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급습하기 위한 복병을 숨겨두었습니다. 무은이 갑졸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뒤쫓다 매복하고 있던 백제군의 공격으로 말에서 떨어져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 신라군이 당황하자 무의의 아들 귀산이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며 큰소리로 외치며 타고 온 말에 아버지를 태워 돌려보내고 소장 추항과 창을 휘두르며 백제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귀산과 추항의 죽음은 신라군의 전의를 불살랐고 결국 신라군의 대승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616년 무왕은 군사 8천명으로 하여금 아막산성을 다시 공격하였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사실 이 전투의 패배는 백제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당시 동원한 병력은 4만이었는데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동원한 병력이 3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백제에게는 대단한 병력을 투입한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백제의 갸아진출을 실패하였습니다. 무왕은 신라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임실에 각산성을 축조합니다. 이에 신라는 605년에 백제의 동쪽을 공격합니다. 이에 백제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무왕은 이에 계획을 변경하여 금강상류지역을 공략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공격한 것은 신라의 가잠성이었고 611년의 일이었습니다. 가잠성은 그 위치가 안성의 죽주산성설과 괴산군설로 나뉘어 있는 등 아직 학계에 정립된 것은 없습니다. 서기 611년 백제의 무왕은 대군을 일으켜 당시 신라의 땅이었던 이 가잠성을 포위 공격합니다. 신라 진평왕은 당시 용맹하기로 유명한 장수 찬덕(讚德)을 신임하여 바로 한 해 전에 성주로 임명해서 가잠성을 지키게 하고 있었습니다. 장수 찬덕은 백제의 포위 공격에 맞서 한겨울에 식량과 물이 떨어져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100일간의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전황을 뒤집기 어려워지자 주위에서 항복하자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찬덕은 "왕께서 나를 믿고 보내셨는데 내가 그 기대를 저버렸으니, 죽어서라도 백제로 부터 이 성을 되찾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끝내 항복하지 않고 느티나무에 달려들어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였습니다. 백제의 가잠성 공격은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한강하류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에 있어 신라의 교통로를 차단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백제가 가잠성을 차지하여 신라는 보은에서 한강 하류지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에 기울던 세력관계를 다시금 백제로 가져오게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3년에 수나라의 6군(軍)이 요하(遼河)를 건넜다. 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히 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兩端策)을 썼다.’ 『삼국사기』
『隋書』에는 607년에 이르러 백제와 고구려가 화친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대수외교를 벌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연결을 꾀하는 양면외교를 벌였다고 하는데요. 백제와 고구려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었다고 보기도 했으나 무왕 때에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제는 598년과 607년에 수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는데요. 양국의 접촉은 동맹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였지만 상호간에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나라에서 백제가 양단책을 쓰고 있다고 인식한 것은 백제가 수나라의 고구려정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고 수가 중국통일 이후 적극적인 팽창주의를 취함에 따라 당시 백제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북쪽의 고구려가 건재해야만 백제의 안전이 담보될 수 있다는 현실적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무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수의 침입을 받은 고구려가 남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백제는 616년에 모산성을 공격합니다. 모산성은 602년에 공격했던 아막산성을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가잠성을 회복하기로 하고 북한산주의 군단을 남으로 돌립니다.
‘40년(618)에 북한산주(北漢山州) 군주(軍主) 변품(邊品)이 가잠성(椵岑城)을 되찾을 생각으로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다. 해론(奚論)이 종군(從軍)하여 적에게 나아가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讚德)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이 싸움에서 해론이 전사하였으나 신라는 가잠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백제와 신라 간의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가 623년에 백제가 늑로현을 공격하면서 다시 재개하였습니다. 하지만 늑로현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624년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당시 신라는 수세에 몰렸습니다. 속함, 기잠. 혈책의 3성이 백제에게 함락되거나 항복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침공이 더욱 사나워지자 신라의 5군은 6성 중 3성을 지키고 있던 눌최를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이에 눌최는 논어의 “추운 겨울이 이르면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듦을 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이 없어 날로 위태로우니 이는 진실로 지사(志士), 의부(義夫)의 절개를 다하여 이름을 날릴 때다”라고 사졸을 격양시키자 사졸들이 죽음을 아끼지 않고 명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 중에 눌최의 종이 있었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소인으로서 특이한 재주가 있으면 해가 되니 그 종을 멀리하라고 눌최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눌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그 종을 곁에 두었습니다. 백제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그 종은 활을 쏘며 눌최 곁에서 떠나지 않으니 백제군이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로 싸웠으나 결국 눌최와 그 종은 더 이상 백제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626년 8월에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하여, 성주(城主) 동소(東所)를 제거하였고 627년 가을 7월에 백제 장군 사걸(沙乞)이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쳐서 빼앗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무왕은 가야지역으로 진출을 성공하자 이제는 한강하류지역회복을 노립니다. 그리하연 군사를 크게 일으켜 웅진(熊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였고 백제의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눈치챈 신라의 진평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무왕은 이에 공격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무왕은 거의 매년 당에 사절을 보내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요. 그렇다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628년 봄 2월에 백제가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였으나 공략에 실패하였고 632년에 맏아들 의자를 태자를 책봉하고 633년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공합니다. 백제는 이 전투로 신라의 수곡성을 차지하였고 636년 갑옷입은 군사 500명을 우소에게 주어 신라의 독산성을 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소가 이끄는 결사대는 성주의 여근곡까지 진출하여 매복하였다가 신라군의 급습을 받아 몰살되었습니다. 무왕은 어느 왕보다도 신라를 무너뜨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이후 당나라와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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