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조 구태는 누구

2023. 8. 17. 19:2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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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북사』 열전 백제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위 기록들에서 보이는 구태는 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미스테리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태를 실존 인물로서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부터 관념상의 건국 시조로 보는 견해까지 있습니다. 공손도가 서기 2세기에서 3세기 초의 인물이니, 그의 사위가 된 구태 역시 그 시대의 인물일 것이며, 백제의 건국 연대도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기원전 18년보다 늦은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태에 대한 기록은 태는 중국의 사료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국내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단순한 중국 측의 기록 오류일 가능성도 있으며 백제가 부여에서 출자하였다는 전승을 받아들이면서도, 우태(優台)와 (위)구태를 착각하여 기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내 사료에서도 구이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고 중국 사료에서도 그 자료는 빈약하다고 합니다. ‘구이가 대방의 땅에서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며 구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시조는 온조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온조가 중국 사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구이가 백제를 건국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이것에 대해 의견을 말했습니다.
‘살피건대, 구이를 혹은 우이라고 하는데, 이는 구가 우의 음으로 변한 것이다. 백제 시조는 온조이지만 여기서는 구이라고 하였다. 구이를 또 온조시조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해동역사』
한치윤은 ‘백제는, 그 시조 구이의 사당을 도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하였다.’는 『수서』의 기록을 옮기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단 것입니다. 그런데 우이는 『삼국사기』 「백제 온조전」에 붙여진 ‘비류왕전설’에서 비류와 온조의 생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해동역사』의 저자 한치윤의 견해는 맞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후한서』나 『삼국지』의 고구려전에는 관직이름에 우이가 있습니다. 『책부원귀』에서는 우태(優台)라고도 한다는데요. 그러면서 우태를 우치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백제 건국자로 전해져 오는 구이는 백제 시조 왕의 이름이 아니고, ‘크리’라는 대공의 위호였다는데요. 백제 시조는 온조이므로 묘당의 시조 크치묘(仇台廟)라 하였을 것이며 특정인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직이름 우이와 연결 지으면서 중국사서에는 온조라는 이름 대신 관직명이 기록된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이’라는 칭호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국내에 남아야 합니다.
그래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이병도의 '구태 고이왕 설'입니다. '구태(仇台)'라는 이름이 '구이'라고도 읽힐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고이(古爾)'와 이어진다는 것이 주요 논거입니다. 이에 따르면 백제의 실질적인 시조는 제 8대 고이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爾)는 중고한어 발음이 /niëx/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古爾는 고니로 읽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구이가 고이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시조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온조라는 시조가 있고 몇 대를 지나 고이왕이라는 시조가 생겼다는 것인데 이것은 온조라는 건국시조를 무시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한 국가의 시조가 한 명이 있는 상황에서 세월이 지나 다시 하나의 시조를 설정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고이왕이 백제의 실질적인 기틀을 갖추었다는 의견이 추가되지만 과연 그것이 온조가 백제의 시조를 제외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병도는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250년 이상의 편년 기록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병도는 “고이왕 이전의 세계(世系)는 추존(追尊)일 것”이라면서 그 이전의 국왕들을 모두 유령으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구태가 곧 위구태이며, 그가 건국 설화 상의 우태라고 보는 시각 중에는 구태를 제6대 구수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구수왕의 아들이 제11대 비류왕이니, ‘우태-비류’라는 건국 설화가 여기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백제의 건국자는 비류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류왕의 아버지 구태가 시조로 숭앙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부여의 위구태왕은 혼인동맹의 댓가로 동연으로부터 훗날의 대방군에 해당하는 영역을 영지로 하사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후 동연의 지휘에서 벗어난 낙랑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자 부여 왕은 대방왕을 겸임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요.  즉, 동연과 위구태왕의 혼인으로 부여의 영지가 된 대방군이 의라왕의 사위 책계왕에게 넘어가자 위구태왕이 백제의 시조 중 하나로 추앙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구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국의 사서 『주서』, 『북사』, 『수서』는 당나라 학자인 영고덕분, 위징, 이연수에 의해 편찬되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백제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나온 책들입니다. 그런데 국내에 전해오는 온조이야기와는 다른 백제건국자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온조의 존재를 몰라서 백제 시조 ‘구이’의 이야기를 담은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를 부여의 남하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부여는 세 차례에 걸쳐 한반도로 남하하였다고 하는데요. 제1차 남하는 고구려의 건국기를 즈음하여 부여 일부의 소수세력이 남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소국 백제(伯濟)로 추정됩니다. 제2차 남하는 고이왕 계열로 3세기 초·중엽에 요동지역의 부여는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게 됩니다. 이 때의 주체세력이 부여왕 울구태이고 이 분이 고이왕으로 추정되며 바로 백제의 건국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3차 남하는 4세기 초로 이 때는 동호계의 선비가 강성해지면서 만주에서 부여가 큰 핍박을 받게 되자 근초고왕(재위 : 346~375) 계열이 한반도로 대거 남하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편 스에마쓰라는 사람은 만주에서 크게 침공을 받고 고립된 부여계가 옥저 지역(현재의 함경도 지역)을 거쳐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백제(伯濟) 지역으로 남하하여 머무르다가 마한을 통일하였고 이 과정에서 350년경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기록(구태라는 자가 있어 대방의 고지에 백제를 세웠다)들을 근거로 하여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미천왕은 사마염의 서진(西晉)이 무너지고 모용씨가 중국의 군현을 압박함으로써 요서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는데 고구려의 미천왕(300~331)은 이런 정세를 활용하여 낙랑과 대방을 합병합니다. 이후 미천왕은 구태(仇台)라는 인물을 대방의 고지에 파견하여 군사령관으로 삼았는데 구태는 주로 중국인 주민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342년 전연(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었을 때 구태는 자립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것입니다. 중국역사서에 별다른 설명없이 ‘구이’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학계는 혼란에 빠지고 일본은 이를 우리나라 고대사 깎아내리기에 이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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