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위덕왕 혜왕 법왕

2023. 8. 15. 09:1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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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전투로 성왕의 전사하자 그의 아들인 여창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27대 왕인 위덕왕입니다. 그는 태자시절 관산성 전투를 지휘하였으니 당시 귀족들은 이것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전투의 패배도 패배지만 이 전투로 그의 부왕 성왕까지 잃었습니다. 이에 부여 창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왕이 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오히려 출가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백제 여창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전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 하십니까. 모름지기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길로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일본서기』
관산성 전투는 여창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스님이 되겠다고 말할 만큼 파장이 컸습니다. 하지만 부여 창이 귀족들이 말을 듣지 않고 벌인 일, 부여 창은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태자 시절 치른 전쟁으로 왕권약화는 피할 수 없었고 귀족을 중심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위덕왕 시절에는 신라와 3차례, 고구려와 2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거의 전쟁이 없었다고 보는데요. 의외로 관산성 전투가 있고 나서 2개월 후에 백제는 보복에 나서 신라의 진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백제는 이 전투로 주민 3만 9천여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가 있은 후 부여 창은 왕위에 올라 45년간 그 자리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관산성전투의 여파로 대가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562년 진흥왕이 이사부로 하여금 신라군을 대가야로 보냈을 때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로 손실이 컸던 지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대가야가 멸망하자 주변의 소국들도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위덕왕의 백제는 전쟁이 이전 왕대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왜국에 군사적 요청을 할 필요가 없었고 그에 따라 왜국에 파견된 사절의 수도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는 신라가 왜에 백제보다 더 많은 사절단을 파견했는데요. 그럼에도 여러 나라들의 사절단을 서열을 매기면서 신라의 사신을 백제의 아래쪽에 서게 했으니 그럼에도 왜국은 여전히 신라보다 백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위덕왕은 중국 왕조들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아마 이를 통하여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덕왕은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찰건립입니다. 그 흔적으로 능산리 폐사지와 왕흥사지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목탑지에서는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나왔으며 이 능사에 대해서 부왕의 명복을 빌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리를 공양한 사람은 왕의 누이로 성왕에게는 진흥왕에게 보낸 딸 말고도 또 한 명의 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능사를 통해 위덕왕은 성왕이 추구하려 했던 이상을 실현하여 더불어 왕권회복을 노렸던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흥사지 발굴과정에서 청동제 사리합이 출토되었는데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을 통하여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덕왕 때에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서기』 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다고 합니다. 위덕왕은 이러한 사서의 편찬을 통해 쉴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했을 것입니다. 
이후 남북조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됩니다. 그리고 수나라의 전선 한 척(隻)이 제주도에 당도하는 일이 발생하여 이 배가 수나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는데요. 이들이 귀국할 때 백제위덕왕은 축하사절단을 보내니 수문제는 굳이 매년 사신을 보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립하고 있었고 그에 반해 수나라는 남북조를 통일하고 중화질서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왕은 수나라가 요동(遼東)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군의 길잡이[軍道]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가 없었기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죄목을 들어 엄하게 나무라게 토발하게 하였는데, 고원(高元, 영양왕)과 그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수나라는] 우리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자못 그 사실을 알아채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수의 고구려 정벌은 2월에 시작하여 9월에 끝났는데,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군도를 청한 것은 9월이기 때문에 백제는 뒤늦게 군도를 요청한 것이 되므로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투에 개입할 생각보다는 수를 부추겨 고구려 국경에 긴장상태를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백제가 수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보내 백제의 국경에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위덕왕은 말년이었고 태자 아좌도 왜에 건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백제군은 이끌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백제는 고구려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위덕왕이 죽고 나서 다음 왕위를 이은 것은 성왕의 둘째 아들인 혜왕이었습니다. 위덕왕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다만 위덕왕이 죽었을 때 70이 넘은 고령이었던 만큼 그에게 정말 후사가 없었던 것은 의문이 듭니다. 위덕왕이 왕위에 있었을 때 태자의 신분으로 아좌가 왜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아좌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하지만 위덕왕이 고령의 나이에 아좌가 왜국으로 건너간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데요. 또한 아좌태자가 성왕의 아들이었다면 왕제로 기록되어야 했지만 그러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태자가 왜국으로 건너가서 하는 일은 청병 등에 목적을 둔 경우였지만 위덕왕 때에는 이렇다 할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겪지 않았습니다. 아마 혜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정변이 있었고 그에 따라 위험을 느낀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변의 이야기는 위덕왕이 군도로 자처하며 고구려와 수의 상황에 대처한 것에 귀족들이 반발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리고 고구려 측에서는 위덕왕이 고구려-수 사이에 개입한 것을 빌미로 쳐들어왔고 귀족세력들이 이를 구실로 위덕왕을 몰아내고 혜왕을 옹립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혜왕도 고령이었던 탓에 그의 치세는 1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혜왕의 아들인 법왕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법왕이 즉위할 때에 과연 경쟁자가 없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아좌태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덕왕의 말년에 고구려가 침입해 오는 위기가 닥쳤는데 이를 물리친 실체가 오리무중이기는 하나 그 사람이 바로 효순태자이며 그는 이 때의 승리를 배경으로 왕위에 올라 법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혜왕의 즉위에 효순태자가 개입했을 것이며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전왕의 아들인 아좌태자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왕이 되는 것보다 자신의 아버지는 왕위에 올렸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혜왕이 뒤를 이어 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도 즉위 2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왕흥사를 창건한 것은 법왕인데 이것은 왕권강화와 관련된 것으로 그러한 정책으로 인해 제거된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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