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백제의 도읍지였을까

2023. 8. 16. 09: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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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

무왕은 42년간 즉위하여 혜왕 - 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백제의 중흥기를 구축했다는 호평을 받는 군주입니다. 반면 무리한 토목 공사와 정복 전쟁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하는 백제의 30대 왕입니다. 
무왕은 풍채와 거동이 뛰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고 평가되는 만큼 귀족들에게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왕으로 보입니다. 무왕은 익산에서 마를 캐고 살았던 만큼 익산은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익산시의 도지방기념물 1호는 왕궁평성으로 이지역 주민들에게는 `모질메 산성'으로 불리우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성은 남북으로 4백95m, 동서로 2백35m인 장방형이며 성벽의 두께가 3m에 달할 뿐 아니라 성벽의 축조기법이 백제 양식이며 성 안에서 그 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한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어 백제의 궁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곳은 백제 무왕(武王)이 천도(遷都)했거나 별도의 도읍지가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후백제 때는 견훤이 궁성으로 잠시 이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안에 국보 289호로 지정돼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춧돌, 그 시대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관상석들이 흩어져 있던 것입니다.  다만 백제 후기 수도가 성왕의 천도부터 의자왕 재위기에 멸망할 때까지 쭉 사비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천도쯤 되는 거대한 일이 현존하는 어느 기록에도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익산의 왕궁설은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요. 그런데 일본에서 관련 내용이 기록된 『관세음응험기』라는 문헌이 발견되자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문헌에는 ‘무강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정사를 지어 경영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여기의 무강왕은 무왕이고 지모밀지는 익산이라는 것입니다. 백제시대의 왕궁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도를 위한 왕궁이었을 확률은 낮으며 그렇다고 평범한 것도 아니지만  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제반 시설들의 흔적이 왕궁리 유적 주변에서는 발굴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던져주게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대동지지』에는 ‘익산은 무왕의 별도(別都)였다. 그는 성을 쌓고 별도를 두어 금마저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고 하니 아마 익산은 적어도 당시 백제 제2의 도시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익산 제석사지

그럼 무왕은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긴 했을까. 일단 익산이 무왕이 어린 시절 마를 캐며 살았던 곳이라는 점에서 익산은 무왕에게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백제는 웅진 천도 이후에 수리시설을 정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개발도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금이 풍부하게 생산된다고 합니다. 금과 관련된 설화가 존재하며 일제강점기 때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금광이 확인되었고 익산의 옛 이름인 금마(金馬)도 분명 금과 관련있 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익산은 해로로 중국과 교섭하기에 용이하고 따라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세력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익산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은 무왕이 이곳에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이 도읍을 익산으로 옮길 계획을 추진하면서 왕궁 부근에 창건한 절입니다. 중국 남조시대 서적인 『관세음응험기』에서 기원전 639년 벼락으로 인하여 불당(佛堂)과 칠층탑(七級浮圖), 회랑과 승방(廊房)이 모두 불탔다는 기록이 있어 7층 목탑, 불당, 회랑(回廊), 승방 등을 갖춘 왕실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6년 7월 출토유물이 공개되었는데 살짝 다문 입술, 지그시 내려가 가늘게 뜬 눈매, 길게 늘어진 도톰한 귓불, 살짝 두툼한 턱이 잘 표현된 천부상의 머리 부분이 출토됐고, 나한상(羅漢像) 혹은 불제자(佛弟子)로 추정되는 2점도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악귀상은 동그랗게 뜬 채로 측면을 응시하는 눈, 살짝 들린 들창코, 야무지게 다문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치아와 송곳니 등이 잘 표현되어 있고, 머리와 뺨, 턱까지 온통 털로 덮여 있으며 눈동자에 유리질이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이 유물들은 형태나 문양, 제작기법의 측면에서 중국 낙양 영령사(永寧寺),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일본 가와하라데라(川原寺) 출토품과 비교해 볼 때 백제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문화교류 양상을 밝힐 수 있는 유용한 자료라고 하니 당시 익산은 교류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무왕 때 지은 절 미륵사가 있는 곳이 바로 익산입니다. 미륵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를 전하고 있는데요. 미륵신앙은 미륵상생(彌勒上生)신앙과 미륵하생(彌勒下生)신앙으로 나뉘는데, 미륵상생신앙이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수행을 하는 내용이라면, 미륵하생신앙은 먼 장래에 미륵불이 출현하여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龍華法會)로 모두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왕대의 미륵산 창건설화에서는 미륵하생설화를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미륵사 터가 세 개의 사찰을 지닌 3원병립식(三院竝立式)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삼회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의 내용을 구상화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하면서 미륵하생신앙을 전개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나가고자 했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왕궁면의 왕궁평성(王宮枰城)이 있는 것입니다. 무왕이 미륵사를 왕흥사라고 한 점도 미륵사 창건이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1년 봄 2월에 사비의 궁궐을 수리하고[重修], 왕은 웅진성(熊津城)으로 행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5권 제27 
무왕 31년인 630년 2월에 사비궁을 중수하기 위해 웅진으로 갔다는 것인데요. 7월에 가뭄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자 다시 사비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630년 이전에는 익산으로 천도를 하지 않은 셈입니다. 630년 이후에 익산으로 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사비궁 중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천도가 이루어질 리는 없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곳은 사비성이므로 익산으로 천도한 시기도 알 수 없듯이 사비로 돌아온 시기도 알 수 없고 따라서 익산으로는 천도가 아예 없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익산 쌍릉 소왕릉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다면 그 이유는 첫째로  고대 왕조가 지배 세력의 교체 차원에서 천도를 단행하던 전례에 비춰보면 무왕이 기존의 사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본인의 출생지 또는 세력 근거지인 익산으로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 둘째로 대신라•가야 공격의 전초 기지로서 익산을 활용했다는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의자가 왕으로 되는 조건으로 사비세력과 합의했을 것이며 또한 무리한 토목공사가 천도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인데 익산에 완공한 절 미륵사,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영되었으니 이른바 궁남지 건설입니다. 익산 천도 무산은 이와 연관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편 2021년 한 대학교수는 사비 도성은 무왕 때 대홍수 등을 겪으며 도시 체계를 다시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됐고, 그에 따라 시가지가 확대되어 익산 기반 세력의 약화 등 정치세력 재편과 맞물려 익산 경영 방식이 바뀌었고 사비 재정비도 본격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말년의 무왕이나 무왕 사망 직후의 의자왕은 익산에 사찰이 의미하는 신성을 부여해 사비와 차별을 둔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는데요. 결국 익산 천도는 계획은 있었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입니다. 현재 익산은 왕궁리 유적의 왕궁이 있고, 제례 시설로는 제석사지와 신동리 유적이 있으며,  미륵사지를 포함한 불교사찰. 익산토성(益山土城)과 금마도토성(金馬都土城) 등의 산성과 익산 쌍릉(益山雙陵)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은 익산이 도읍지로서의 요건을 설명해주지만 고대 도성 형태를 보여 주는 나성과 조방제 같은 시설이 발견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익산천도를 설명하는 문장이 없어 익산천도는 확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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