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관산성 전투

2023. 8. 14. 09: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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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의 협공으로 한강유역으로부터 고구려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한강의 상류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밀약을 맺었습니다. 성왕은 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가야 및 왜와 좋게 지내면서  군사적 지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백제, 가라, 안라가 중부 덕솔 목리금돈,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 “고구력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지금 백제왕, 가라왕, 안라왕이 일본부의 신하들과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것을 다 들었다. 역시 임나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황공하신 천황의 영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 『일본서기』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하지만 신라가 고구려와 힘을 합해 한성을 포함한 한강이남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아마 이 때 고구려는 남평양 일대를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으로 성왕의 고토회복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임시방편으로 신라 진흥왕에게 자신의 딸을 소비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는 성왕이 한강 하류 영유권 문제를 문제 삼지 않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표현이었지만, 백제의 군사 동맹이자 지원군을 파병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이미 553년부터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비 부여씨는 전쟁을 준비할 약 1년간의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이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왕은 이제 밀약을 맺은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한 번에 두 나라를 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에 백제는 신라를 치기에 앞서 고구려를 대적하기로 합니다. 장소는 百合이란 곳으로 넓게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습니다. 다만 그 위치에 대하여 황해도 해주 혹은 양주에서 멀지 않은 평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한강입구지역으로 북상하여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야간공격도 있었으나 백제군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날이 밝자 전투가 전개되었고 고구려의 선봉장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이후 승기를 잡은 백제군은 여세를 몰아 동성산까지 쫓아갔습니다, 여창의 백제군은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철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투의 목적은 고구려군의 상태를 파악하고 연합을 견제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제군은 한강 이북으로 북상하기 위해 신라의 지원을 필요로 했는데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지원요청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신라는 얼마 후에 고구려를 임진강 이북으로 밀어내고 한강 이북지역을 장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성왕은 백합야새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사실상 깨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성왕은 2번의 신라의 배신에 대규모군사를 일으킵니다. 바로 554년의 일입니다. 성왕의 신라공격에는 백제군 외에도 대가야와 왜군도 합세하였습니다. 백제는 일본으로 각종 박사와 화공, 악인등의 기술자를 비롯, 승려를 보내주었고 왜는 이에 대해 유사시에 백제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지원한 것입니다. 성왕의 병력 요청에 일본의 흠명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야군이 더해졌습니다. 성왕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하류지역이 아닌 관산성으로 향했습니다. 관산성은 추풍령을 넘어 아산만과 남양만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에 있는 곳으로 신라 입장에서 이곳을 상실할 경우 금강 상류를 지키는 것이 힘들게 되어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신라입장에서는 지켜야 하는 최전선이고 백제는 이를 다시 장학하여 신라로 진격하려 한 것입니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기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일본서기』

기로들은 천시가 불리하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겨울에 군사를 동원하기 때문에 시기가 좋지 않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백제군의 선봉은 막기무련이 맡았습니다. 백제군은 함산성을 공격한 지 하루 만에 함락하는 전과를 이루었습니다. 함산성을 차지한 후 여창이 이끄는 백제의 주력부대가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구타모라에 보루를 쌓고 관산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에 신라군도 대응하였습니다. 신라에서는 상주의 군주인 우덕과 이찬 탐지가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전세는 신라에게 불리하였습니다. 따라서 진흥왕은 신주 군주 김무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와 연합작전을 하도록 했습니다. 백제군과 신라군간의 전투는 7월에 시작되어 12월에 접어들어 지구전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15년(554)〕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나아가 서로 맞붙어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성왕은 보기 50명을 이끌고 오다가 매복하고 있던 신라의 군대를 만나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왕이 관산성으로 향한 것은 후방에 머물러 백제군을 독려하다가 태자 여창을 위로하고 전선을 시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삼년산군 출신의 고도에게 참수당하는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왔다는 것을 듣고, 나라 안의 군사를 모두 일으키고, 도로를 막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는 좌지촌(佐知村, 충북 보은)의 사마노 고도(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谷知)에게, “고도는 천한 종놈이요, 명왕은 이름 있는 왕이다. 지금 천한 종으로써 군왕을 죽이게 하려 한다. 후세에 전하여져서 길이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붙잡아 재배하여, “왕의 머리를 베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종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一書에 명왕이 의자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주어 베게 하였다라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여 눈물을 흘렸다. 허락하여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고 머리를 늘여 베임을 당하였다. 고도는 참수하여 죽인 후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일본서기』
여창은 포위당하여 이를 빠져 나오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서는 왜 지원군의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이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태자가 이 샛길로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을 죽인 인물은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이며 고간은 외위(外位)로서 경위(京位)의 급찬(級飡ㆍ9등)에 해당합니다. 백제 국왕을 참수한 인물치고는 상당히 낮은 지위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 성왕을 죽인 인물이 고도(苦都)라 하며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삼국사기』는 군공을 대표할 수 있는 장수 이름을 앞세웠고, 일본서기는 치욕적인 노비 이름을 부각시켰는데 아마 신라는 백제 성왕(명왕)을 사로잡기 전에 이미 고도로 하여금 죽이게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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