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북위 전쟁 진실 혹은 거짓

2023. 8. 11. 09:0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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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북위 오랭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건무 2년, 모대가 사신을 보내와 표문을 올려 말하길, 신은 봉작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중략)…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남제서』
한국사 최대의 미스테리 중 하나 바로 백제와 북위가 싸운 『남제서』의 기록입니다. 이 사건은 북위의 백제 침공이라고도 하며, 웅진시대 백제 제24대 동성왕 재위기간 중 백제와 북위 사이의 일련의 전쟁으로 484년 백제를 공격해 이겼고 4년 뒤인 488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백제에 패하였고 490년 북위가 다시 백제를 침공했으나 사법명과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에 의해 수십만 기병을 잃었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 기록이 크게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북위는 명군 효문제가 왕 자리에 있었으며 그에 반면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목잘려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초유의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난데 없이 화북지역에 있는 강대국인 북위를 상대로 싸웠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제-북위 전쟁이 성립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북위와 백제 사이의 거리도 문제가 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으로는 북위가 건너와 백제와 싸움을 벌인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유목민족인 북위가 황해를 건너오는 것도 그렇지만 육로로 고구려를 통해 온다는 것도 쉽게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건이 벌어진 것은 5세기후반이니 이 때는 전성기를 맞은 대가야가 호남 동부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백제의 본토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위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는 대성팔족에 해당하고, 기사에 등장하는 장군들이 승전 이후 받은 지역도 모두 전라도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위 전투가 요서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백제군은 본토에서 해로를 따라 요서 지방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에는 고구려의 연안을 거쳐 가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고구려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고구러 군대에게 이를 들키지 않고 백제가 과연 바다건너 군대를 동원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한편 북위는 효문황제(孝文皇帝)는 5살 어린 나이에 즉위해 풍태후(馮太后)가 섭정하고 490년 풍태후가 죽자 효문제가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남제서』에는 ‘서기 490년에 위나라가 기병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백제의 동성왕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쳤다’란 글이 나오는 것입니다. 과연 효문제가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군사를 일으켰을까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그리고 혐윤이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이 때 혐윤이 아마 북위가 아니고 고구려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각에서는 백제가 490년에 격파한 상대는 북위가 아닌 고구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 대해 허구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는데요.  일제 강점기 시절 도쿄제국대학의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주장한 것인데 이 기록이 우리나라의 기록이라는 점과 『남제서』에서 왜 이런 허구기사를 써넣었는지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남제가 백제의 말에 속아 백제가 북위를 격파한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도 생각하기 힘듭니다. 
어쨌든 이 기록이 사실이라 믿는다면 해결해야할 많은 역사적 숙제를 많이 안고 있는 셈입니다, 특히 목간나는 과거에도 군공이 있었다고 하니 이를 488년에 있었던 북위와의 전쟁으로 보고 있으며 백제는 488년과 490년에 적어도 두 번은 북위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간 것을 보입니다. 그런데 사법명부터 목간나에 이르기까지 4명의 백제장군들은 남제의 장군호를 제수받게 되는데 왕이나 후에 봉해졌고 그 앞에는 지명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명에 대해서는 중국 역대 지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백제지역으로 보고 있는데요. 왕과 후에 붙은 지명으로 면중은 전라남도 광주, 도한은 전라남도 고흥이나 나주지방으로, 팔중은 전라남도 나주일원으로, 아착은 전라남도 여수로, 매로는 전라북도 옥구나 전라남도 보성 혹은 장흥 일원으로, 불사는 전라북도 전주로, 벽중은 전라북도 김제로 비정된다고 합니다. 반면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했다고 하고 이는 모두 중국의 지명이라고 하니 아리송할 따름입니다. 

한편 백제가 보낸 국서에서 490년에 북중국의 북위로부터 침공을 당했다지만 도리어 역습을 가해 북위를 패퇴시켰으며 이로 인해 "바닷물이 들끓듯"했다고 했습니다. 서해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며 ‘이 기회를 틈타 쫓아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습니다.’는 것은 서해상에서 북위 군대를 격파한 뒤 계속 추격해서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군이 북위 땅에 상륙해 승리를 거뒀음을 의미합니다.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의 동이열전은 백제 영토를 설명하면서 "서쪽으로는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월주는 상하이 근처 절강성(저장성)에 있었으며 이는 동성왕의 군대가 월주까지 갔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 부대가 중국 본토에 상륙해 영토를 차지했으며 그 후에 백제 군대가 월주를 차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상고사』는 위의 『구당서』 기록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에 영토를 둔 때는 백제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두 시대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북위기사는 그렇다하더라도 현재 학계에서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 아니 아예 없다시피하기 때문입니다. 열전 10권 중 3권을 김유신전으로 도배하고,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항쟁한 백제 장수 지수신을 누락시키고 당나라에 항복한 흑치상지를 열전에 넣는 것을 보면 김부식이 그렇게 많은 중국정사를 참고하였음에도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백제에 대해 감정이 있어 일부러 누락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백제와 북위가 싸운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위나라가 우리(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삼국사기』
사건의 규모에 비해 그 기사내용이 워낙 간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북위가 되었든 고구려나 다른 제3의 나라가 되었든 간에 분명 백제가 이 시기에 싸움을 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혹여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면 의혹은 쉽게 풀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백제가 신라와 493년에 혼인동맹을 맺었고 이미 이전 문주왕시기에 제라동맹을 맺었으니 이것은 대륙백제를 경영하기 위해 한반도남부 안정도모를 의식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남래한 한성귀족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한성수복에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어쩌면 북위 공략에서 백제군이 패한다면 그로 인해 동성완은 구귀족의 약화라는 반사이익을 노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가정은 어디까지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대륙백제를 설명하기 위한 소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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