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신왕과 목만치 비유왕과 제라동맹

2023. 8. 9. 08:0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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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신왕은 제 19대 왕으로 전지왕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팔수왕비입니다.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왜국에서 백제로 귀국할 때 혈례가 왕위를 찬탈하는 바람에 귀국에 늦어져 섬에 머물렀던 40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420년 16살의 일입니다. 왕위에는  약 8년간 재위했으나 즉위와 사망 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었습니다. 물론 워낙 오래된 일이라 사료가 충분치 않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8년이라는 재위기간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기사는 너무 짧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것은 더 간소한데요. 즉위와 사망 기사가 다입니다. 더욱이 중국측 사료를 보면 『송서』에서는 여영(전지왕)에서 여비(비유왕)로 백제왕이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고 구이신왕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이신왕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인물은 바로 목만치입니다. 백제장군 목라근자가 신라를 공격하던 369년 신라여인과 정이 통해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목만치는 369년 즈음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리고 구이신왕이 왕위에 즉위했을 때에 16세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구이신왕에 대해  어리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구실로 목만치가 국정을 운영했다는 것입니다. 구이신왕의 어머니는 팔수부인으로 아마 백제에는 그를 지지할만한 세력이 사실상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팔수부인이 목만치의 애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구이신왕이 16살에 즉위하였으니 팔수부인이 섭정했을 것이고 그러한 것을 목만치가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목만치에 대해 목협만치와 동일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목협만치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에 보신으로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369년에 태어난 목만치가 475년에 활동하였으니 그 때는 목만치의 나이가 100세가 넘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대한 기록을 남긴 신공기 49년의 기록을 3주간 인하하여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목만치의 출생연도는 429년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목만치와 목협만치를 동일시하기 위한 억지스런 꿰맞추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구이신왕 대에 활동한 목만치의 행적은 부정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맞추는 이유는 목만치와 개로왕 대의 목협만치의 이름이 같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비류왕 대의 해구와 문주왕의 대의 해구를 같은 이름이라 하여 동일인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띠라서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명이인인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목만치는 구이신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가 국정을 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게 됩니다. 사실 이후로도 사서에서는 목씨에 대한 기록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로왕 4년에 유송으로부터 제수받은 11명의 귀족 중 왕족을 제외한 제 1위의 용양장군 목금과 한성 함락 후 문주왕의 웅진천도에 기여한 목례만치는 그 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씨는 가야 경영을 기반으로 성장했을 것을 보고 있으며 구이신왕의 어린 것을 이용하여 엄청난 세력으로 부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씨의 전횡은 구이신왕의 권한약화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23세에 죽었다는 것은 정치적 투쟁의 결과일 수 있으며 따라서 비유왕의 등극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유왕은 백제의 20대 국왕입니다.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왕의 아들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하므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 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비유왕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모습이 아름다웠고 구변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유왕은 국왕으로서 어느 정도 자질이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 
그에 대해서 추대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젊은 나이에 죽은 구이신왕의 죽음에 결코 자연사라고 볼 수 없으며 뒤이은 비유왕의 즉위 역시 지지 세력에 의한 왕위계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왕은 서자로 백제사에서는 서자의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었습니다. ‘서자’라는 것이 여러 아들이라는 의미와 적자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쓰이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정비의 자식은‘자’, ‘원자’, ‘장자’ ‘제 2자’, ‘중자’ 등의 표현을 쓰는데 반해 정비소생이 아닌 경우는 서손, ‘서제’ 등의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비유왕의 어머니는 팔수부인도 해씨 귀족 딸도 아닌 왕비로 책봉되지 않은 여자의 아들인 셈입니다. 이런 서자 신분의 왕의 탄생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바로 누구일까요. 아마 선왕대 구이신왕의 권세에 눌려지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목만치가 구이신왕이 죽자 비유왕을 왕위에 옹립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는 목만치의 횡포를 보다가 그를 소환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윤색했다는 이유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구이신왕에서 비유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목만치 역시 정쟁에 휘말렸고 이 싸움에서 진 목만치가 왜로 망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주목할 것이 바로 429년에 해수를 상좌평에 임명한 것입니다. 분명 비유왕의 등극에 해수가 큰 공을 세웠을 것이며 구이신왕에서 비유왕으로 바뀌는 것은 목씨에서 해씨로 조정의 실권이 옮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왕은 외교분야에 있어 노력을 많이 한 왕입니다. 비유왕 2년에는 50명에 이르는 왜국 사신을 맞이했으며 특히 남북조시대의 유송에게 조공을 자주 바쳐 425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교과서에 기록된 그의 성과는 바로 나제동맹입니다. 일각에서는 백제가 동맹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제라동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 동맹에 고구려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427년 장수왕이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겼으므로 거기에 백제가 더욱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433년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 마립간이 체결한 동맹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맞붙는 554년까지 근 12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다만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에 따르면 449년까진 고구려와 신라가 형과 아우의 나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제동맹은 더 나중에 시작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을 9월에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었다.’ 『삼국사기』 「개로왕조」
흑룡은 초고왕계 왕실을 상징하는 동물로 본다면 비유왕은 결코 자연사한 것은 아닐 것이며 고구려 승려 도림의 말은 비유왕이 무덤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혹은  검은색이 북방을 뜻함에 따라 백제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암살했다고 해석될 수 있으므로 여러모로 비유왕의 죽음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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