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정벌에 실패한 백제 아신왕

2023. 8. 7. 07:5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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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17대 왕은 아신왕입니다.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도 하며 제15대 침류왕의 맏아들이기도 합니다. 출생설화로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신비한 빛이 밤을 밝혀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실 이전의 왕은 진사왕으로 자연사해서 왕위를 아신왕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라 진사왕의 사냥에 몰두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고대임금의 사냥터는 그 희생물을 바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요. 여기서 국가의 중대한 일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니 사냥터에서 10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은 어쩌면 이 자리에서 진사왕의 폐위가 논의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방의 긴요한 곳인데 지금 고구려가 소유하고 있으니 심히 통탄스럽다.’
『삼국사기』「아신왕조」
관미성을 상실한 것은 진사왕 시기의 일입니다. 진사왕이 폐위되었다면 그 요인은 도가를 신봉했던 진사왕 세력과 불교를 신봉했던 아신왕 세력 간의 갈등이기도 하겠지만 위 아신왕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의 대고구려정책에 대한 불만이 내재되어 폭발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사왕이 사냥터에서 10일동안 행방불명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아신왕이 즉위한 것이 392년 11월이고 393년 1월에는 그의 장인인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합니다. 좌장은 병마권을 관장하는 백제의 관직으로 아신왕의 즉위 2달 만에 그의 장인인 진무가 좌장이 되었다는 것은 아신왕이 왕위에 오를 때에 진무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며 왕이 되기 전에 진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아신왕의 등극으로 불교와 도교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 종식되었을 것입니다. 
진무는 강인하고 침착하며 지략도 뛰어나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신왕은 즉위 2년에 그를 군대 최고 직위인 병마사(兵馬使)로 삼아 백제 군대의 지휘권을 주고 관미성을 되찾도록 했습니다. 아신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백제의 최고 영웅 진무는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광개토대왕의 남하정책으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공격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무가 5개성을 탈환했으나 관미성만큼은 고구려 군사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끝내 되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군량수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394년에는 백제군은 수곡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수곡성은 이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수곡성은 백제북진의 한계선으로 근구수태자의 말자국전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395년에도 아신왕의 북벌은 계속되어 8월 진무를 다시 시켜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백제군의 규모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군보다는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추수 직전인 농한기를 이용하여 벌인 전투에 광개토대왕이 직접 기병 7,000기를 이끌고 와서 전투한 결과 백제군이 대패해 8,000명이나 전사했다고 합니다. 아신왕은 복수하기 위해 11월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본인이 직접 7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려 했으나, 한강을 건너 청목령까지 갔을 때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얼어 죽기에 이르자 되돌아와 한산성에서 군사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신 아신은 영원히 고구려 대왕 폐하의 노객이 되겠습니다.’
광개토왕 비문에 보면 ‘서기 396년에는 백제를 쳐 58개성 700개촌을 빼앗았다.’ 하고는 ‘도성에 쳐들어가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그의 동생을 볼모로 잡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문은 백제를 잔(殘), 혹은 잔국(殘國)이라고 한껏 멸시하는가 하면 그 국왕, 즉 아신왕을 가리켜서는 잔주(殘主)라고 깎아내리고 있는데요. 광개토왕 비문은 고구려 측의 일방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비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이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고구려가 백제에게 느꼈던 라이벌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아신왕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항복을 예를 올렸으며 남녀 생구 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고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백제로서는 타국의 왕에게 처음으로 항복의 예를 올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로 잃은 많은 성들이 남한강 상류 지역의 교통로에 소재된 것으로 파악되므로 이는 고구려의 대군이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군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입니다. 한편 이 일은 아신왕을 지원한 진씨 세력에게도 큰 타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해씨세력이 부상한 것인데요. 전지태자의 비로 해씨세력의 여자가 책봉되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재위 6년(397년) 7월에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했고 7년(398년) 2월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았습니다.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은 것은 승진한 것이지만 대신 진무는 병마권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아신왕은 고구려공격에 대한 실패한 것에 대한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려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왕실과 진씨 세력 간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 해 3월에는 쌍현성(雙峴城)을 쌓은 데 이어 같은해 8월 고구려를 다시 치기 위해 정벌군을 일으킵니다.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를 파견하다.’ 『삼국사기』 아신왕 6년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직지(전지)를 천조에 보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 『일본서기』

396년에 아신왕은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이웃나라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친했으므로 왜에게 왕자를 파견합니다. 솔직히 바다건너 왕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만큼 백제의 상황이 절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전지태자가 일본으로 간 것에 대해 인질이란 표현을 썼는데요. 그런데 ‘인질’이란 표현이 「광개토대왕비문」이나 『일본서기』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어떠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399년 왜가 신라로 침공합니다. 이 때 백제도 참전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백제도 이에 동참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8월 농번기가 끝나자마자 아신왕은 군사와 말을 징발합니다. 하지만 진사왕 이래로 백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아마 이러한 내부 상황은 백성들에게 부담이었을텐데요. 이러한 것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반면 가야군과 왜의 연합군은 신라국경에 가득하엿다고 하니 신라는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5만의 군사를 동원했는데요. 하지만 백제가 참여하지 않은 전쟁에 고구려의 군대는 신라에 무사히 입성하기에 이르렀고 가야-왜 세력을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중국을 제외한 만주-한반도-열도 세력간의 대규모 국제전은 고구려가 승리하였습니다. 
403년에는 백제가 왜와 가야를 끌여들여 또다시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고구려는 후연을 상대하느라 대부분의 군대가 요하와 대릉하선에 있었습니다. 
404년에는 다시 왜와 가야를 끌여들여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공격합니다. 흥미롭게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할 때 썼던 수륙 병진책을 따라 해서 수군과 육군으로 황해도의 석성(石城)을 짓밟은 후 평양성까지 쳐올라갔는데 결과는 또 패했습니다. 사태가 좀 커지자 광개토대왕이 직접 와서 적의 길을 막은 뒤 좌우로 공격하여 격퇴시킨 것입니다. 이 때 특히 왜인이 많이 죽었다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 신라 공격 직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였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과 같았다.‘ 『삼국사기』
위 기사는 아신왕이 죽기 여섯 달전의 일인데요. 오방색에 의하면 흰색 자체가 서쪽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결국 요약하면 서쪽 세력에 의해 시해됐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아신왕은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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