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류왕 불교를 수용하다

2023. 8. 5. 07:5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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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난타는 인도 간다라 지방을 출발해 실크로드(길기트-훈자-쿠차-돈황)를 거쳐 중국 동진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중국을 떠나 해로를 통해 백제로 건너온 때가 서기 384년입니다. 당시 백제의 왕인 침류왕은 궁궐 밖까지 나와 이 귀한 손님을 반가이 맞이했고, 궐에 거처를 마련해준 뒤 설법을 청하여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마라난타가 찾아온 항구를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에서 법성포(法聖浦)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라난타와 관련된 사찰은 불갑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불갑사입니다. 이 절은  유서 깊은 고찰로 백제 침류왕(384년)때 법성면 법성포를 통해 최초로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인도승 마라난타 존자가 세운 절입니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는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행 정도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마라난타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마라난타의 교화에 힘입어 백제는 392년(아신왕 원년) 2월에 ‘불법을 숭상하고 복을 구하라’라고 하는 교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마라난타라는 이름을 번역하면 ‘동학(童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침류왕의 치세는 상당히 짧습니다. 384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385년에 사망했으니 채 2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왕위 자리를 유지한 것인데요. 침류왕의 짧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 이름을 남길 수 있던 것은 384년에 불교를 공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침류왕이 불교를 공인한 데에는 따로 배경이 있지는 않았을까. 침류왕은 어떻게 불교를 알고 있었을까. 침류왕의 아버지는 근구수왕이며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라고 합니다. 근구수왕은 태자시절 고구려와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데요. 적을 쫓던 중 수곡성에 이르렀을 때 장군 막고해가 추격을 말리며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태자 근구수왕이 이를 받아들였으니 그가 혹시 노장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요. 반면 근구수왕의 부인이자 침류왕의 어머니인 아이부인은 진씨로 불교를 신봉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마라난타가 백제로 오기 전에 백제 왕실의 누군가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인데요. 그러다보면 도가사상을 믿는 왕과 불교를 믿는 왕비 그리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불교 도교 세력들 간의 갈등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이부인에서 이름인 ‘아이’가 여승을 의미하는 ‘아니’와 연관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그렇다고 한다면 아이란 이름은 불교식 이름인 셈입니다. 

▲ 백제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국보11호 미륵사지석탑.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침류왕 즉위년조에 왕모 아이부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백제본기에서 왕모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침류왕 즉위 초에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부인의 의견을 좇아 불교를 들여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짧았던 그의 치세를 생각할 때 건강상의 문제가 있던 침류왕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승려의 힘으로 고치려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침류왕이 일찍 죽은 것은 왕실 갈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것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다음 왕이 그의 아들인 아신이 아닌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라는 점입니다. 진사왕은 즉위 후에 궁궐에 못을 파고 기금(寄禽)과 이훼(異卉)를 길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도가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불교를 받아들인 침류왕의 뒤를 이은 것은 도가사상에 심취한 그의 동생 진사왕이라는 점은 침류왕과 진사왕, 즉 형제간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그 원인은 바로 사상의 차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것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것은 『삼국유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백제왕실과 관련된 불교관련 기사입니다.
‘“아신왕 즉위년 2월 왕이 명하여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下敎崇信佛法求福)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3 마라난타조
그런데 이 사료는 그대로 신빙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아신왕 즉위년은 전왕인 진사왕의 말년으로서 진사왕이 세상을 떠난 때가 11월이었기 때문에 그해 2월은 아신왕이 아직 즉위하기 이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삼국사기』권18 고국양왕조에는 고구려에서도 ‘고국양왕 9년(392) 3월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여 똑같은 표현의 기사가 전하는데, 고국양왕 9년은 그 아들인 광개토왕이 이미 즉위한 다음 해이기 때문에 시기상으로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한편 백제의 불교사에서는 침류왕 원년(384), 또는 아신왕 원년(392)부터 성왕대(523~554)에 이르도록 1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불교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불교가 왕실에서의 믿음이 깊이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데요. 다만 이전에 침류왕과 진사왕이 정말 불교와 도가라는 사상적 갈등을 일으켰는지 추측도 쉽지 않은 것이 백제가 불교를 동진으로부터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도가사상을 매개로 하여 불교를 이해하던 격의 불교가 동진에서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백제에서 동진을 통해 받아들인 불교는 청담을 즐기는 풍조와 함께 현학적인 귀족불교였다면 아마 사상 갈등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더 깊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라난타가 백제로 왔을 때 개인자격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침류왕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것처럼 중으로 영접하고 예로 대했다고 하는데요. 『삼국사기』는 이듬해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도첩(度牒)은 나라에서 발급하는 승려증명서입니다. 9월에 백제에 온 마라난다는 불과 5개월 사이에 사찰을 세우고 승려를 교육시켜 국가로부터 도첩까지 받아낸 것입니다. 만약 백제 내에 불교가 퍼지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일까 생각해보면 마라난타가 이미 백제로 오기 전에 침류왕은 물론 백제인들은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단 이야기입니다. 

▲ 헬레니즘적 요소가 가득한 간다라 미술.

침류왕의 초청으로 마라난타가 왔다면 이전에 이미 민간에 혹은 왕실차원에서 일부 믿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기록상으로 보면 백제불교는 대승불교의 거점이자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간다라’가 시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는 다른 경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라난타는 백제의 첫 도읍지에 절을 세웠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가 세운 절의 위치를 알아낸다면 백제의 첫 도읍지 위치도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성백제 또한 현재로서는 잠실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 등이 유력하지만,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를 후보지로 꼽기도 한만큼 한성백제의 위치에 대해서는 배알에 싸여있는데 마라난타가 세운 절의 위치가 그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라난타스님이 간다라출신이라는 점에서 의심을 품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교수는 한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주장학자는 『해동고승전』(1215년)에 마라난타가 ‘축건(竺乾)으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을 1991년 한글대장경에서 ‘천축의 간다라’로 번역했다면서 마라난타가 간다라 출신이라는 오해는 이 같은 작지만 매우 심각한 번역상의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이와 다른 스님은 문헌해석을 통해 간다라가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이 맞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먼저 ‘천축’은 옛 인도의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며 간다라도 천축에 포함되므로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이 간다라일 수 있다는 점부터 언급했습니다. 이어 ‘해동고승전’ 저자 각훈 스님은 동일한 책에서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천축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에 주목한 뒤 마라난타 스님에 대해서만 ‘축건’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마라난타 스님은 천축 중에서도 간다라 출신임을 밝힌 의도라고 분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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