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의 대 고구려 전투

2023. 8. 4. 07: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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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차남으로 출생연도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백제의 왕 중에 초고왕이 있었으니 초고왕의 혈통임을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전왕은 계왕으로 왕 묘호가 외자인 것은 여러모로 심상치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왕 이후에도 혜왕, 법왕, 무왕 등 외자 묘호가 나오지만 이는 남북조나 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데요. 이와 달리 계왕은 아예 묘호를 받지 못해 이름에다가 왕을 갖다 붙인 것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이나 어떤 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추론해야만 하는 실정입니다. 다만 계왕의 아버지 분서왕이 살해된 뒤에 비류왕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계왕의 치세가 고작 2년도 되지 않는다는 점은 순탄치 않은 그의 왕 생활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근초고왕은 초고왕의 직계임을 내세우고자 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계왕과 근초고왕의 왕권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의 즉위 이전 왕위계승은 초고계와 고이계에 의해 분립적으로 이어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후부터는 근초고왕의 직계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면서 초고계에 의한 단선적인 왕위계승이 확립되었습니다. 왕위계승이 안정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고, 정국 운영의 주도권도 귀족이 아닌 왕이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안정은 근초고왕이 대외 정복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폈습니다. 고구려도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천왕이 313년에 군현을 축출하였지만 그 자리에는 여전히 중국계 호족세력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하며 호족들이 백제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자 백제의 진출을 견제하자 고구려의 고국원왕도 대군을 파견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연 모용씨와의 대결에서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전연 모용황의 침략으로 국도가 함락되었으며 실왕인 미천왕의 시체를 빼앗기고 왕모, 왕녀가 잡혀갔습니다. 고구려는 이후 왕의 동생을 입조시켜 미천왕의 유해를 돌려받고 요동진출을 포기하고 대외정책을 남진으로 바꿉니다. 고국원왕의 백제를 견제하여 만회하고자 한 것인데요. 따라서 이들 간에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雉壤, 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침공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진을 치고 민가를 약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치양을 비롯한 대방 지역의 남부주민들이 백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에서 싸웠다,’

이들은 반걸양에 이르렀습니다. 태자 근구수가 나가서 싸울 때, 백제의 도망병으로 고구려군에 참전한 ‘사기’가 탈영하여 백제군에 제보하기를 “고구려의 군사 수가 많으나 숫자만 채운 군인들이고, 오직 적기병(赤騎兵)만이 용맹하니 그들만 깨치면 나머지는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근구수가 그 말을 좇아 용감한 정예병을 뽑아 적기병을 깨뜨리니 고구려군이 무너져 수곡성 서북(신계)까지 진격하였습니다. 그곳에 기념탑을 만들고, 패하(浿河: 대동강 상류) 이남을 전부 백제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태자 근구수는 전투에서 패배한 고구려군이 후퇴하자 이를 쫓았습니다, 예성강 상류에 위치한 수곡성까지 추격하였습니다. 근구수는 수곡성에서 장군 막고해의 진군 중지 요청을 받아들이고 철군하였습니다.
‘오늘 이후, 누가 어려움을 극복하여 다시 이곳에 오겠는가?’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린 것입니다. 부여구수는 이를 옳다고 여기고는 더 이상 고구려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대신에 돌을 쌓아 올려 표시를 남겨 놓고는 그 위에 올라 "오늘 이후로 누가 어려움을 극복하여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백제는 근구수왕 이후로 다시는 평양성 근처까지 올라가지 못합니다. 
 370년 전진이 전연을 격파합니다. 그리고 전진과 고구려의 국경을 맞닿게 되었습니다.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피신온 전연의 권신인 모용평을 전진으로 압송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호관계를 성립한 것인데요. 고국원왕은 북방에서 우호관계를 통하여 안정을 꾀하였고 대신 남진을 통하여 잃어버린 땅을 찾고자 합니다. 371년(근초고왕 26)에는 고구려가 재침공 했습니다. 이 때 백제는 패하(浿河:예성강)인근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3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총 공격을 진행합니다. 3만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던 것은 당시 백제사회가 수장층 위주의 전사 집단의 성격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던 호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전쟁을 바뀌었기 때문인데요. 전투의 규모는 커졌고 특정한 전사집단의 참전에서 일반백성들의 참여가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백제는 4세기 이후 철제를 활용한 토목용구를 사용하였고 우경의 보급, 토질의 개선 등으로 점차 공동체소유에서 개별적인 토지사유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소농중심의 농경사회의 주체인 소농민은 평상시에는 괭이와 낫 등을 통하여 생산력 활동을 힘을 쏟았고 전시에는 철모, 철촉 등을 무장하여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3만의 백제 군대는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의 평양성은 남평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

한편,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습니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백제 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백제와 일본열도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가 있습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근초고왕시기에는 요서지방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무역기지를 확보하는 등 해상로를 장악하여 활발한 상업활동도 전개한 시기로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 자리잡은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해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해상제국을 이룩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근초고왕이 즉위해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고 재위 24년(369)에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제만 쓸 수 있는 황색 깃발을 사용합니다. 황색의 깃발은 오행사상의 오방 중에 중앙을 뜻하며 이는 기존 독립적인 부병의 군대가 중앙군으로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천자(天子)를 자처하였으며 다시 말해 백제를 천하의 중심에 두고 제국을 경영한 것입니다.
근초고왕은 대방지역의 주민들을 자국으로 이주시킵니다. 그것은 백제에게 문화발전과 더불어 기술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는데요. 이즈음 박사 고흥을 시켜 국사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습니다. 근초고왕은 대방지역을 장악하여 교역망을 확충하고 대외무역을 독점하였으며 동진과 왜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국제적인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서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375년에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킵니다. 근초고왕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려 햇으나 흉년이 들고 실행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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