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의 남벌

2023. 8. 3. 07:4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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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근초고왕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제1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46년~375년인데요.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쳐, 남쪽으로는 마한 세력을 통합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북쪽으로는 대방군과 낙랑군의 일부 지역을 확보했고, 평양성까지 진출해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요서지역과 왜에도 진출하여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이로써 백제 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하며 전성기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한 대외정책은 전라도, 낙동강유역, 그리고 황해도 방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근초고왕의 정복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 중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서기』인데요. 이 기사에서는 근초고왕이 행한 한반도 남부에 대한 공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신공황후 섭정 49년(369)123)조에는 백제·신라·가야·왜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공황후가 파견한 왜병이 탁순에 모두 모여 신라를 격파하니 이로 인해 비자발(창영)·남가라(김해)·록국(창영 영산?)124)·안라(함안)·다라(합천)·탁순(창원?)125)·가라(고령) 등의 7국을 평정하게 되었다. 거듭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해진(강진)에 이르고 남만 침미다례를 정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초고(근초고왕)와 왕자인 귀수(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니 비리·벽중·포미지·반고 사읍126)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목라근자 등은 의류촌에서 회합한 후 천웅장언만이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 백제왕은 이후 변함없이 서번으로서 끊임없이 조공할 것을 맹세했다.’
 한때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는 데에 이용된 근거자료 중의 하나였던 이 기사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음이 분명하지만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치환할 경우 역사적인 진실을 일부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백제와 왜병이 연합한 전쟁의 결과 백제에 대한 비자발 등 7국의 종속, 침미다례의 정벌, 비리 등의 항복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정복활동은 노령산맥 이북의 전라북도 일부와 낙동강 유역, 그리고 전라남도 해변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백제의 남벌은 어렵지 않게 진행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주와 전주 등을 거쳐 슬치 등을 통해 전북 동부에 위치한 임실지역으로 나아갔는데요. 마한의 이 지역은 당시 지역별로 그 세력이 나뉘어져있어 백제가 이들을 제압하는데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형으로 보면 섬진강은 경사가 급하고 수량의 계절변동이 심하였으며 가항거리도 상대적으로 짧아 강상수운이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육로로는 노령산맥이 가로막았는데요.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해당 지역이 통합하는데에 어려움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안군을 비롯하여 남원시, 임실군, 순창군, 곡성군 등에서 조사된 말무덤 혹은 몰무덤의 추정형태를 보면 백제의 지배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요. 말무덤의 ‘말’은 마(馬)의 뜻으로 보고, ‘말’은 ‘머리’ 혹은 ‘크다’ 뜻으로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관형사로 파악하여 그 피장자는 마한의 지배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말무덤을 근거로 원삼국 시대 때도 여전히 순창이 거점 지역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창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유역에서 마한의 지배자 무덤인 말무덤이 어느 시기 일시에 자취를 감춥니다. 말무덤이 가야계 고총(古塚)으로 발전하는 백두대간 동쪽과 달리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성기 백제가 금강과 섬진강을 잇는 간선 교통로를 따라 진출하여 순창군을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시킨 결과로 판단됩니다. 마한의 말무덤이 자취를 감춘 이후에는 가야계 고총을 비롯한 어떤 유형의 수장층 분묘 유적도 조영되지 않았습니다. 백제는 남원을 비롯한 섬진강 유역에 속하는 전북 동부지역을 장악한 후 가야세력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근초고왕이 가야를 경략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합니다. 근초고왕 대의 사실은 아니고 『일본서기』에 편찬할 때에 백제 유민들이 참여했고 그들에 의해 기술되었다던가 5세기 중엽 이후의 사실을 시기적으로 앞당겼다는 것입니다. 한편 성왕 때의 가야지역에 대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하는데요. 근초고왕이 가야7국을 정벌했다면 그것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루어낸 성과라기보다는 탁순, 비사절 등과 동맹을 맺거나 통교한 사실을 좀 더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백제는 침미다례를 정벌합니다. 침미다례는 313년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서(遼西)로 축출된 이후 서남해 지역 해상 활동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신미국의 전통을 계승하여 서남해 지역의 역내 교역, 가야·탐라 및 왜국 등과 연결되는 대외 교역을 주도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서남해지역 해상세력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지금의 강진이나 해남 등지로 보고 있습니다. 백제군은 침미다례를 철저하게 도륙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저항이 심했던 탓도 있지만 이들의 대외교섭권을 박탈하고 그 영향력 아래에 있던 세력들에게 위압감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침미다례는 중국-가야-왜를 이어주는 대오외교섭으로 해당 해안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이를 장악하여 경남남부지역으로 이어지는 대왜교역로를 개설하기 위한 거점을 활용하는 것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지역의 수장층과 공납관계를 맺어 공물을 징수하고 해안의 교섭거점을 직접 지배하거나 친백제세력에에 위탁 관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전남 해안의 강진을 장악했음에도 실제 영토로 편입시키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그 동안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우리 지역이 백제 지역으로 편입되었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고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만 실상은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주장되어온 근초고왕의 마한편입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을 바탕으로 이병도 선생이 일찍이 주장한 이래 교과서에 서술되어 정설화 되었는데요. 최근 신공기 49년조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함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초고왕 때 전라도 해안까지, 즉 마한 전 지역이 백제의 지배 체제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많은 반론이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영산강 유역에 대형 옹관묘들이 많이 존재한 사실과 이 지역에 백제의 대표적 묘제인 석실분이 근초고왕 때보다 100여 년 늦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유입되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그동안의 통설이 부정되고 있습니다. 설사 근초고왕의 군사력이 우리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접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 형태 내지는 교역의 거점을 확보하는 수준이었다는 견해가 다수입니다. 결정적으로 『삼국사기』 근초고왕 시기의 기사 가운데 마한을 점령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다만, 한강유역의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한반도 남서쪽에 군림하던 부족연맹체 마한의 영역이 남쪽으로 위축되었던 것은 사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삼족토기라 하여 재떨이 모양의 세발 달린 토기가 있는데 이 토기는 경기도 북주지역에서부터 서울의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각지에서 발견되는 백제의 영역을 가늠할 수 있는 토기입니다. 그런데 이 유물이 정작 그 모습을 노령산맥 이남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은 전라남도 남부에 대해 확고히 지배체제를 가져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백제가 이러한 마한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것은 한강유역연맹체를 기반으로 성장한 백제가 만주로부터 남하한 백제를 받아들이고 기마전을 하는 백제군이 아직 보전(步戰)단계에 있는 마한을 격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험한 산세가 아닌 마한지역의 평편한 지대는 오히려 백제군에게 힘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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