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고이왕과 기리영전투

2023. 8. 1. 07:4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728x90

 

고이왕은 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데  즉위 후 국가 체제의 정비와 집권력의 강화에 주력해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기반을 다져 놓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해 좌장(左將)을 설치,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지배 체제의 정비를 위해 중앙 관등제를 마련하였습니다. 고이왕 때의 중앙 관제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이른바 ‘6좌평·16관등제’가 고이왕 27∼28년에 완비된 것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고이왕은 또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법(犯贓之法)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3배를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禁錮)케 함으로써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이왕시기에 대외적인 방면으로도 성과를 보였는데요. 마한과의 관계에서는, 아산만 일대에 자리 잡은 목지국 세력을 압도해 마한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고 낙랑군·대방군과의 관계에서는 이전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자세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이왕 때는 안으로는 지배 체제를 정비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영역의 확대하였으니 후에 백제의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고 할만합니다. 
고이왕의 백제는 주변국들과 종종 다툼을 벌이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낙랑입니다.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자주 영토를 침범해 오므로 편연한 날이 적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

고이왕 이전인 온조왕 대에는 낙랑이 동쪽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마 고이왕 대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역사서에서 낙랑은 백제와 신라를 종종 침범하였고 신라의 수도 경주 근처까지 쳐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낙랑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낙랑왕 최리를 만난 것으로 보아 아마 함경남도 남부나 강원도 북부에 있던 나라로 여겨지는데요. 중국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세운 낙랑군(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의 정확한 위치와 지역별 인구센서스가 2005년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나무에 기록한 행정문서)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북한에서 제공한 목간 사진 덕분이었는데요.  이 목간은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簿(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다소□부·□는 판독 불가)라는 제목으로 인구센서스 결과를 약 710자로 적은 것입니다. 목간에 따르면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가구는 4만3845호, 인구는 28만4261명이었습니다. 목간에는 평양, 평안남도, 황해도, 함경남도, 강원도 지역에 해당하는 낙랑군의 25개 현의 지명이 모두 기록돼 있습니다. 낙랑군이 이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동안 한국, 북한, 중국학계에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한반도(대동강 유역), 중국 요동, 요서 지역 등으로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다만 해당 목간에서 말하는 시기는 기원전 45년이므로 이후로 고구려가 세워지면서 영토가 축소되고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를 백제 고이왕 시기에 유지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론 이 낙랑에 대해서는 낙랑군과 구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낙랑군이 32년에 고구려에 멸망한 것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낙랑과 백제가 부딪힌 사건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기리영 전투입니다.  기리영 전투(崎離營 戰鬪)는 246년 마한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를 의미합니다. 
‘부종사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가 격하고 한(韓)이 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 「위서」 한전
‘가을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貫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하위통치기구입니다.  한과 예에 대한 교섭을 담당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한의 환제와 영제시기에 많은 백성이 한과 예에 유입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는 후한말로 삼한과 예가 강성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즉 중국은 위, 촉, 오로 분열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한사군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237~239년 위 명제 조예는 태수들을 파견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하고, 주변 한(韓) 세력에 회유책을 펼쳤습니다. 246년 8월,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사이에 낙랑군의 관리였던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자신의 편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 한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246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함께 고구려를 칠 때 고이왕은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 변방을 습격하게 하여 주민들을 대거잡아오기도 했습니다. 그 이듬해인 247년에는 마한연합군이 대방군 기리영으로 쳐들어간 것인데요.  고구려를 공격하러 갔던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은 다시 돌아와서는 복수하겠다며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한(韓)을 정벌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한연합군은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킬 정도로 선전했으나 마한은 패배하였습니다. 이후로 목지국은 맹주국으로서의 그 자리를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다만 백제군은 큰 타격을 면할 수 있었는데 낙랑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며 낙랑군과 화친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그 한(韓)의 신지가 한의 소국 중 어느 나라의 신지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에 대해 크게 백제국설, 목지국설, 신분고국설로 3가지 견해가 갈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신분고국이 주목받은 것은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臣智激韓忿)’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통지(通志)』에 인용된 보다 오래된 판본에서는 ‘신분고한이 분노하여(臣濆古韓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분고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중 마한 54개국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백제국보다도 앞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소국들의 위치는 대체로 뒤로 갈수록 남쪽으로 비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분고국은 황해도 지방의 대방군과 교전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래도 기리영전투는 마한의 패배로 끝난 지라 몰락하는 시점으로 보기도 하지만 도리어 백제는 이를 기점으로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더올랐다는 분석입니다. 
백제는 말갈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이전왕인 사반왕이 어려서 퇴위당했다고 하나 일각에서는 당시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고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고이왕이 즉위했다고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한군현과 말갈, 신라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고이왕이 즉위하기 5년 전인 234년 구수왕 시기에는 우곡에서 말갈에게 대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이왕 시기에는 말갈의 장나갈(長羅渴)은 좋은 말 10필을 고이왕에게 선물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까지 사이가 급변하게 된 데에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데요. 이왕 시기인 3세기 중반부터 한강유역(서울 송파 석촌동)에는 고구려의 대표 무덤 양식인 돌무지무덤(적석총)이 갑자기 출현한다는 점, 그리고 돌무지 무덤은 황해도와 평안도 등 한반도 북부에는 없고 주로 압록강 중류(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집중 분포한다는 점은 고이왕세력이 이 지역과의 연관성을 추측하게 합니다. 특히 고이왕 시기 좌평에 임용된 관료는 우수(*고이왕 동생), 우두, 고수, 곤노, 유기 등이며 모두 기존의 백제에 없던 성씨들로 고이왕과 함께 출현하여 백제 지배계층을 형성한다는 점은 고이왕의 출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