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국가기틀을 마련한 고이왕에 대한 의문

2023. 7. 31. 07: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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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8대입니다. 재위 기간은 234∼286년이며 제5대 초고왕의 동생인데요. 제7대 사반왕이 나이가 어려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왕위 계승과정이 순조로웠느냐는 것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데요. 그보다 먼저 재임한 왕인 사반왕이 어려서 폐위되었다고 하지만 그 과정은 왕위 찬탈로 보는 것입니다. 사반왕은 구수왕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재위기간은 채 2년도 되지 못했는데요. 일단 사반왕은 구수왕의 정비소생일 아닐 확률이 커보입니다. 4대 개루왕이 38년을 재위했고 5대 초고왕은 48년을 재위합니다. 그리고 6대 구수왕도 20년을 재위하는데요.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른 뒤 곧바로 폐위되었다고 하니 분명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구수왕이 늦은 나이에 어린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실에서는 후사를 중요하게 생각할 진대 정비에게 아들을 얻지 못하여 나이 차 나는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서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사반왕은 왕실외부에서 여러 가지로 혼란과 우려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므로 초고왕의 동복 아우인 고이가 올랐다.’ 『삼국사기』
사반왕에 대한 기록은 이것뿐이라고 하니 그가 왕위를 빼앗겼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사반왕이 단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자리에서 물러났다면 고이왕이 죽고 나서 사반이 그 뒤를 잇거나 사반이 죽었다면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으면 될 것이지만 고이왕의 뒤를 이은 것은 고이왕의 아들 책계였습니다. 이는 사반왕이 나이가 어려 어쩔 수 없이 잠시 내려온 것이 아닌 강압에 의한 찬탈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상황입니다. 
‘고이왕 즉위 3년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대대적인 사냥을 나가 몸소 사슴 40마리를 쏘아잡았다’ 『삼국사기』

임금의 사냥에는 몰이꾼뿐만 아니라 많은 경호 인력들이 동원됩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수준의 경호체제가 유지되던 궁궐을 벗어난 것입니다. 불만세력들은 임금의 사냥이야말로 그나마 실낱같은 정권탈취를 노려볼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냥을 정변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측면은 없진 않지만 생각해볼 문장인 것입니다.
고이왕에 대한 의문점은 그가 과연 초고왕의 동복아우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개루왕은 서기 166년에 죽었고 그 후로 초고왕이 48년, 구수왕이 20년을 재위하였으니 개루왕이 죽을 당시 그가 초고왕의 아우로 태어난다 해도 68세에 즉위한 셈입니다. 그런데 그는 왕위자리를 52년이나 유지합니다. 그러면 그가 사망했을 당시 나이는 120세가 되는 것이니 그가 과연 초고왕이 동복아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백제왕들의 출계가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와 우태(優台)의 아들인 비류(沸流)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즉, 주몽-온조-초고(肖古)로 이어지는 이른바 ‘초고계’와 우태-비류-고이로 이루어지는 소위 ‘고이계’가 있었으며, 두 계통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고이왕의 즉위를 왕실의 교체로 이해합니다. 주몽과 온조를 시작으로 초고왕-구수왕-사반왕까지 직계로 이어지던 왕위계승이 고이왕에 이르러 갑자기 방계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이왕은 사반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구실로 왕을 폐하고, 일종의 정변을 통해 즉위한 것이 됩니다. 이후 고이왕의 자손인 책계왕 (責稽王, 재위 286~298)과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이 왕위를 이음으로써 이 시기는 고이계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고이왕의 즉위는 초고계에서 고이계로 왕실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반대로 백제의 왕들은 왕계의 변화 없이 모두 온조왕의 후손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온조와 비류의 건국설화는 백제가 비류국을 흡수해 연맹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고이왕의 즉위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비상조치였다고 설명합니다. 대내적으로는 사반왕이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고, 대외적으로는 한군현과 말갈, 신라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탁월한 개인적인 능력과 모계와 연결된 진씨 세력의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고이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록상 사반왕과 6촌 관계에 있는 고이왕은 같은 온조계의 후손으로, 단일한 왕계에 속한 인물이 됩니다.

한편 온조가 아니라 고이왕이 백제의 건국 시조라는 이런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쓰다 소우키치의 제자 이병도는 1948년에 간행한 「조선사대관」에서 “온조가 과연 주몽의 아들이냐 아니냐 함은 별문제로 삼고 그가 남래(南來: 남쪽으로 옴) 즉시에 건국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다만 후일 건국의 기초인 부락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고 온조 건국설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나의 연구한 바로는 엄밀한 의미의 백제의 건국은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에 되었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서술했는데 이것이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온조의 건국을 부인하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삼국사기』에 고이왕 27년(260) 6좌평 및 16관등제를 완비했다고 나온다는 점과 중국의 주서(周書)에 ‘백제의 수도에 시조 구태(仇台) 묘가 있어서 매년 네 번씩 제사 지낸다’는 구절의 구태를 고이왕으로 보고 고이왕이 백제의 건국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병도는 “구태(仇台)의 태(台)자는 원음이 ‘이’음인즉 구태는 ‘구이’로 발음할 수 있는 동시에 이와 근사음인 백제의 고이왕을 연상치 않을 수 없다”면서 구태의 음이 구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지만 음이 비슷하다는 것이 과연 그들이 동일인물일 수 있는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고이왕은 백제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이왕(古爾王)) 27년(260) 봄 정월,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왕명의 출납 일을 맡도록 하고, 내두좌평(內頭佐平)을 두어 창고와 재정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을 두어 예법과 의례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을 두어 숙위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을 두어 형벌과 감옥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27년
여기서 더해지는 의문은 삼국사기에 실린 고이왕인 업적들입니다. 고이왕은 16관등체계를 확립하고 관리들의 북장에 대해 규정하고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백제는 고이왕대에 잘 짜여진 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춘 정월에 영을 내리어 무릇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여  종신토록 금고에 처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조
그런데 삼국사기 고이왕 27년의 기사는 백제 말기가 아니냐는 시선도 존재하고 고이왕 29년의 기사는 『구당서』의 백제조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막상 『구당서』에는 해당 기사에 대한 기년이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그대로 적되 임의로 짓지 않는다.’는 신념을 책을 집필합니다. 그러면 김부식이 『구당서』를 보충 역사서로 활용하면서 『구당서』외에 다른 역사서로 고이왕의 관제정비나 복장규정 법령에 대한 기사를 보았을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구려나 신라는 소수림왕,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했다고 기록에 써있지만 백제는 정확한 율령 반포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이왕 대에 율령이 반포되었다고 학교에서 배우는데요, 그 근거가 되는 것이 『삼국사기』 29년의 기사인데 우리가 배우는 것에 비해 고이왕은 물음표가 많은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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