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초기 수도 위례성은 어디인가

2023. 7. 29. 07: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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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동토성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 중 한 곳인 풍납동토성

백제의 건국설화는 고구려와 신라의 것과는 달리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백제의 초기도읍지는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漢城)은 백제입니다. 하지만 비교적 현실적인 건국설화에 비해 백제가 처음으로 도읍한 위례성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분분합니다. 
그럼 위례성은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사실 이것도 그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위례’ 가 방어시설이자 담장을 가리키는 ‘우리 울’, 성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위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역사상 최초의 국가형태인 성읍국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혹은 ‘왕성’을 뜻한다는 견해, 동족이나 씨족을 의미하는 ‘우리’에서 유래한 것을 보기도 하며 강변에 소재한 성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혹은 ‘큰 성’을 뜻하는 것을 보기도 하는데요. 『일본서기』에서도 ‘고구려의 군대가 이레 동안의 낮과 밤으로 대성을 공격하여 왕성이 함락하였다.’라고 적혀있기도 합니다. 위치만큼 그 이름에 대해서도 해석이 많이 갈리는 편입니다.  
백제의 초기 도읍이 한강유역에 있었다는 믿음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온조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에 있던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나오며 이때 한산이 다름 아닌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해 명확히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례성에 있던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겼으나 초기 위례성은 경기도 광주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초기 위례성은 어디였을까. 고려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 위례성이 당시의 직산(오늘날 천안)의 ‘성거산 위례성’이라고 믿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성거산 위례성에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지며 온조왕 13년(AD 1세기)에 이곳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온조왕이 강변에서 용이 되어 물살을 헤집고 있을 때, 마침 어머니 소서노가 큰 아들 비류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작은 아들 온조와 합칠 것을 권하기 위해 위례성을 찾아온다. 온조의 움막에 들어가 보니 온조는 없고 행방조차 아무도 모르는지라 소서노는 반란군이 온조를 죽였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함께 온 비류의 부하들로 하여금 온조의 부하들을 무찌르게 한다. 온조의 부하들은 비류가 온조를 쳐부수러 온 것이라 판단하고 힘껏 싸워 비류의 부하뿐 아니라 소서노까지 죽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온조는 부하들로 하여금 돌을 날라 오게 하고 위례성 우물에 돌을 던져 북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는다. 이후 온조는 왕이 되어 한강변 광주(하남)땅에 다시 위례성을 세우는데 그 이후로 위례산의 위례성 우물은 흙탕물이 고이게 되었다고 한다.’ [충남전설집](충청남도향토문화연구소, 1986년)

▲ 이성산성 한때 위례성의 후보지로 거론된 이성산성, 발굴조사 결과 신라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온조는 서기전18년 한반도로 남하하여 미추홀(충남 아산 인주)에서 형 비류와 함께 있다가 서기전14년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직산위례성(위례산성)으로 분립하며 온조의 백제를 정식으로 출범시켰습니다. 이때 온조의 분립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 소서노가 비류와의 재결합을 설득하기 위해  온조를 찾아왔다가 뜻하지 않게 온조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니 그것이 바로 위례성 우물설화입니다. 소서노의 죽음을 알게 된 온조는 형 비류의 문책이 두려워 급히 한산으로 천도하는데 한산은 지금의 경기 광주(하남)의 하남위례성(남한산성)이라는 것입니다. 조선 세종은 삼국의 수도를 밝히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삼국유사』 <왕력>의 온조왕 기록에 근거하여 직산(稷山)을 온조의 위례성으로 고증합니다.
 ‘위례성에 도읍하였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이다.‘
직산은 지금의 충남 천안으로 당시 세종은 특별히 직산에 온조왕사당을 건립하고(세종11년,1429년) 직접 향축을 내려 제사지내기도 합니다. 이후 조선에서 발간하는 각종 지리지는 충남 직산을 온조의 위례성으로 표기합니다. 현재 직산에는 위례산성(직산 성거산)이 있으며, 온조의 신하를 조상으로 하는 직산조씨(조성), 천안전씨(전섭), 목천마씨(마려) 등의 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직산이 초기위례성으로 주목받는 『삼국사기』에는 위례성 인근에 있는 한산, 부아악, 한수등의 지명을 열거하는데 그쳤지만, 『삼국유사』는 구체적으로 위례성의 지명을 직산(稷山)이라고 적시했기 때문입니다. 백제 초기의 주적은 동북부 지역의 말갈과 북부의 낙랑이었습니다. 두 세력은 연대해서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온조는 13년(BC 5년)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고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아 말갈과 낙랑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이때 옮긴 도읍이 천안 직산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온조왕과 관련한 많은 기록과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직산을 백제의 첫 수도로 주장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13년을 백제의 초기수도로 보낸 후 한성(서울)에서 480년 그리고 웅진백제 63년, 사비백제 122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천안은 마한 목지국(目支國)이 버티고 있었다는 게 학계의 주장인 바, 위례성 직산설이 힘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 경당지구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呂’자 형태의 건물지

조선후기에도 이러한 위례성의 위치에 의문을 품은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정약용이었습니다. 그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에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옮겼다면 위례성은 직산(천안)이 아니라 더 북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약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왕의 순행 구절에 주목했습니다. 바로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이 구절이 바로 온조왕의 초기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한강 이북 어딘가에 오리지널 위례성이 있었고, 그곳이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자주 받으니 강을 건넌 곳이 하남 위례성이었고, 다시 한산으로 옮겨갔다고 본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서기』와 차이가 난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이들은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한 채 하남 위례성을 광주, 한산을 남한산에 비정하고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지금의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해방 후에도 그러한 관점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친일식민사관의 거두라고 평가받는 이병도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합니다. 세검정 유역을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여러 전승과 기록을 종합해 광주고읍(古邑)과 남한산성이 조선시대에 임금의 피난처이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곳을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한 것입니다. 
 몽촌토성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때 쌓은 토성이라는 점과 초기 백제시기의 유물의 출토가 된 바 이곳을 하남위례성으로 보고 있는데 1997년 풍납동토성 발굴조사에서 경당지구에서 '呂'자 형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제사 시설로 추정됩니다. 우물지에서 제의용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토기류와 말머리 뼈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와 관련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에서 기와 건물은 사찰이나 사당, 왕궁과 관청 등에서만 쓰였던 것으로 기록된 걸 보면 백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을 보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부여 관북리 유적이나 익산 왕궁리 유적처럼 풍납동토성에서 왕궁으로 특정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풍납동토성 = 위례성'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현재 고고학계의 대세는 평상시에는 풍납토성, 위기시에는 몽촌토성에 머물렀다는 의견입니다. 그리고 위례성은 이 모두를 통칭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고구려에서도 안학궁 - 대성산성이나, 국내성 - 환도산성 등을 이처럼 평시 성과 위기시 성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온조왕이 우려했던 낙랑과 말갈의 침입은 어디서 왔을까. 이 문제에 답하고자 초기 백제의 수도를 한반도가 아닌 만주지역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으며 또 다른 학자는 신라임금이 월성-금성-만월성 등으로 옮겨 다녔듯이, 한성백제 왕들 역시 하북 위례성에 이어 풍납토성-몽촌토성-이성산성-춘궁동 왕성 등으로 옮겨다녔을 것이라는 학설을 새롭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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