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계 영웅인가. 배신자인가. 흑치상지
2023. 1. 22. 19:0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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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이란 죽은 사람에 대한 사실을 기록해 무덤에 묻은 판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석에는 조상의 계보, 생일과 죽은 날, 평생의 행적, 가족 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며 무덤 앞이나 옆에 묻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에 대해 사실관계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192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북쪽에 있는 북망산에서 백제인의 지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흑치상지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지석입니다. 흑치상지란 사람은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달솔, 즉 지금의 국방부차관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던 나름 왕족집안의 출신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현덕이었고, 아버지는 사차였으며, 모두 달솔을 지냈습니다. 상지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동작이 빠르고 힘이 세고 꾀가 넘쳐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석의 발견으로 하나 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가 사용하는 흑치라는 성씨에 관한 것인데 현대 우리나라사회에서 쓰이지 않는 흑치라는 성에 대해 치아에 검은 물을 들이는 남방의 습속을 가진 집안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석에서는 그들에 선조에 대하여 말하길 부여씨에서 나온 것을 말하고 있고 그에 따라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를 성으로 삼았다고 기록하여 흑치상지도 백제왕실에서 갈라져나온 가문의 사람인 것입니다.
660년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지만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부흥운동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인물에는 복신과 승려 도침이 있어 그들은 주류성에 터를 잡고 당나라에 저항하였으며 당시 흑치상지는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열흘도 안되어 약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만큼 흑치상지에 대한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것입니다. 소정방은 이를 우려하여 흑치상지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흑치상지는 당시 200 여성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기세는 나당연합군이 점령한 백제의 지역을 사비성과 그 일대로 좁히게 하였습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소정방은 의지왕을 데리고 당나라로 달아났습니다. 당시 흑치상지는 의자왕을 구해내고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군에서는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을 왕으로 삼아 부흥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백제의 부흥운동을 내분을 맞이하였으니 도침과 복신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복신은 도침을 죽이게 되었고 이에 백제의 왕자 부여 풍이 복신을 죽였습니다. 그에 따라 백제부흥운동군은 지도자 두 명을 읽어 그 세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백제부흥운동을 끝낼 수 없었고 백제부흥운동군은 일본의 지원군과 함께 백강 어귀에서 나당연합군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을 부여풍의 군대라고 기록해 놓았으니 일본은 당시 백제의 제후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는 나당연합군에게 돌아갔고 백제는 회생의 불씨마저 꺼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당시 백제의 뛰어난 장수로 알려져 있던 흑치상지는 당나라 고종에게 제안을 받게 됩니다. 끝까지 싸우다가 죽느냐, 아니면 투항하여 당나라의 장수로 살아가느냐 여기서 그의 선택은 당나라로 건너가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나라의 군대에 가담하여 백제의 임존성을 공격하는 것을 돕습니다.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의해 웅진도독부 산하 웅진성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배반자였을까. 지석에서는 그가 웅진성주가 되었을 때 사대부와 백성이 기뻐했다고 기록해놓았으니 그가 백제유민들로부터 여전한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의해 조작된 기록인지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당나라는 백제의 유민들로부터 가장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흑치상지로 하여금 웅진성주로 발탁하여 반발심을 최소한 하려던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였고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675년에 매초성에서 신라가 크게 이긴 결과 전쟁의 운은 신라로 기울었고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에서 자신들의 군대를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와 함께 흑치상지도 당나라로 건너가 좌련군원외장군양주자사로 임명되어 지금의 중국 산시성 일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에서 제 2의 인생을 살게된 흑치상지, 그에게 맡겨진 임무 중에 하나는 토번을 정벌하는 일이었습니다. 토번은 중국의 서쪽의 넓은 땅을 차지한 나라로 당나라가 서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토벌해야할 나라였습니다. 678년 흑치상지는 49세의 나이로 하원도경략대사 이경현을 따라 토번공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경현이란 사람이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던 탓에 토번과 싸우는 것에 대해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토번과 상대하기보다는 달아나기에 바빴으며 도망치다가 진흙땅에 빠지며 군대도 군경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나선 것은 흑치상지였습니다. 그는 5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한밤 중에 토번의 진영을 급습하여 붕괴시켰고 이에 토번의 사령관 발지설은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흑치상지에게 상을 내리고 하원도경략부사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다음 해에도 토번의 군대가 쳐들어왔으나 이경현의 군대는 이를 감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이 때 흑치상지는 3000명의 기병으로 야간에 기습하여 적을 대파하였으며 이에 당조정은 이경현을 대신하여 흑치상지를 하원도경략대사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81년에도 토번이 쳐들어왔으나 이를 다시 흑치상지가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684년에는 서경업이란 사람이 반역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궐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흑치상지의 군대는 돌궐의 군대가 갑옷으로 갈아입는 사이에 습격하여 첫 번 째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687년에는 돌궐 황제 쿠틀룩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고 흑치상지는 연국공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를 시기하던 무리가 있었습니다. 687년에 그는 회원군경략대사로서 좌감문의중랑장 찬보벽과 한께 돌궐을 토벌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와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당시 찬보벽은 흑치상지와 상의 후에 전투에 임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았는데 이를 무시하고 혼자 공을 차지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다가 전멸당한 것입니다. 이 실패로 찬보벽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우응양장군 조회절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고 결국 누명을 벗지 못한 채 689년 60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이에 당나라의 힘에 보탰고 당나라로 건너가 장수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따라 단재신채호 선생은 흑치상지에 대해 백제복국운동의 배신자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옛 사서의 사실은 좀 다릅니다.
“한 군사가 흑치상지가 타는 말에 매질을 했다. 부하 장수가 그 자를 죄주고자 하니, 상지가 ‘어찌 내가 타는 말을 매질하였다는 이유로 관병을 매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받은 상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재물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매우 슬퍼했다‘ 『삼국사기』
하지만 흑치상지는 백제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일 수 있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의 최후의 결사항전지는 처음 거병의 진원지이던 임존성이었습니다. 이 곳은 철통수비를 자랑하던 곳으로 신라군이 한달 여를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임존성의 함락이라는 숙제는 당나라에게 넘겨졌고 그 문제를 푼 것은 바로 흑치상지였습니다. 그런 그가 삼국사기에 좋은 쪽으로 실린 것은 아마 『삼국사기』가 신라의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죽어서 북망산에 묻혔다는 것입니다. 북망산은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살아서는 항주(杭州), 죽어서는 북망’이라 할 정도로 특별한 곳이므로 흑치상지가 어찌하여 이러한 장소에 묻혔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로 가서 출세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고선지와 비교하기가 애매한 것은 고선지와는 달리 흑치상지에게는 자신의 조국을 배신한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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