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

2022. 12. 3. 07:5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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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상

마애불이라는 것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불상은 2~3세기 인도에서 석굴사원을 조상하며 시작되었는데 이 후 서역과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고 우리에게 알려진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도 만들어진 것도 이 때이니 서기 6세기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석불로 알려진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로 이 불상은 높이가 52.6m, 34.5m의 거대한 2개의 불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탈레반 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가 이슬람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로켓탄으로 불상을 파괴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의 미소로 자리 잡은 마애불상은 신라에서는 경주 남산의 칠불암 마애불상군, 신선암 마애보살상, 용장사지 마애불좌상 등을 남겨졌고 고려 때는 그 크기가 거대한 17.7m의 파주 용미리 마애불로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애불은 미륵신앙과 관련이 깊었는데 미륵신앙은 석가모니 입멸 56억7000만 년 후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하생하여 미륵불로 성불해 용화수 아래에서 대중을 구제한다는 신앙으로 고려시대에는 미륵불과 마애불을 조성하며 미륵하생을 소원했던 것입니다. 

사면불 예산화전리 석불

이러한 마애불, 특히 충남지역에 있는 불상들에 대하여 세계 유산의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200여개가 조성됐지만 그 기원은 당연히 백제의 마애불이며 태안 마애삼존불입상(6세기 말), 서산 마애여래삼존상(7세기 초), 예산 사면석불(6세기 말)등이 바로 그것이라는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특히 백제 지역에 이렇게 마애불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태안과 서산, 예산 등 이 곳이 불교를 수용하는 선진지역이라는 분석결과도 내놓았습니다.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곳은 중국 산둥반도를 연결하는 해로 상에 있어 중국문물을 수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백제마애불은 고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상징적의 이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6세기 이래 남조의 불상양식 이후의 중국의 북제와 수나라의 불상양식 거거에다 백제 고유의 양식이 더해지며 이러한 문화의 흐름은 신라와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마애불은 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서산마애삼존불상입니다. 이 불상을 설명하는 문구 백제의 미소라는 것도 대중에게 익히 알려졌는데 다른 불상들이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두게 하는 반면 서산마애삼존불은 중교적 상징물에서 보여주는 묵직함은 내려놓고 편안하고 푸근한 이미지로 사람을 맞이합니다. 이 불상은 세 개의 불상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석가여래, 그리고 왼쪽에 제화갈라보살입상, 그리고 오른쪽에는 미륵보살반가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제의 미소는 석가여래가 하고 있는 것으로 제법 토실토실한 얼굴 모습에 푸근한 인상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애불은 서산마애삼존불 말고도 여러 개 있는데 예산 화전리 석불은 국내 유일의 사면불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후 580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 태안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조성한 마애불로 보고 있습니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해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022년 2월 국내의 한 과학자는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군이자 유일한 고구려 석조불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중 붕황리 교각미륵불상에 대해 고구려가 남진했던 396년에서 445년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았는데 그러면 태안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576년~600년의 조성시기보다 앞선 것이 됩니다. 이 봉황리 마애불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78년이었는데 당시 고구려에서 보이는 특징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단정 짓기는 어렵다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의 신라불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에 대해 꾸준히 연구를 진행한 학자는 이 불상이 모습이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된 황흥 5년 전법륜인 교각상과 같이 두 다리를 교차하고 두상을 화불로 감싼 것을 확인하였고 연흥원년 교각상처럼 장방형 얼굴에 두터운 입술을 가진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상들은 471년에 조성된 것으로 봉황리 마애불도 고구려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워진 자리는 신라의 형제의 관계를 맺은 사실은 알린 중원고구려비와도 불과 4~5㎞자리에 있으므로 이 불상의 조성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성과물로 보았습니다.  
그럼 마애불은 백제 사람들이 충남 해안가에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당시 정세와 관련 있습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신라의 한강유역 확보로 인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백제는 한강중하류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습니다. 당시 한강은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였는데 이 지역을 다른 나라에 빼앗겼다는 것은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충남서해안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고역이 이루어졌고 그 중 태안은 중국의 산둥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백제인들은 이 곳을 통해 중국으로 나아갔고 이 곳에 마애불을 설치하여 산둥반도와 태안을 오가는 백제 사람들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 것입니다. 

태안마애삼존불상

마애불은 일반 불상과는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불상은 대부분 절 안에 있기 마련인데 절벽에 새겨지는 마애불의 특성상 절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절이라는 장소에서 벗어난 마애불은 지나가는 누구나 맞이할 수 있는 보다 친근한 불상이 된 것입니다. 불교에 대해 잘 모르고 서툴더라도 그리고 엄숙한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누구나 이곳을 지날 때면 자신들의 소원을 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가 그렇게 편안하고 온화하게 새겨졌는지도 모릅니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의 미소로 불리고 있지만 한동안 그것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보호각을 설치했기 때문입니다. 목제 보호각을 만든 이유는 비바람으로부터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1965년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보호각과 암벽 접합 부위의 시멘트 콘크리트가 빗물에 녹아내리면서 바위를 뿌옇게 변색시켰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통풍이 되지 않는 나무각 속에 갇힌 마애불은 갑갑한 습기 속에 고생해야 했습니다. 서산마애삼존불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나무각이 오히려 마애불의 보존에 역효과를 초래했으며 또한 이러한 보호각은 관람객들의 관람마저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보호각으로 인해 어둑해진 내부의 마애불의 미소는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지적을 교훈삼아 2006년에는 보호각 가운데 기둥과 지붕만 남겨놓고 벽체와 문을 철거하여 채광과 통풍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서산마애산불상을 다시금 햇빛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기둥과 지붕만 남은 시설은 다소 어색하고 주변의 경관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3007년에는 지붕과 기둥마저 철거하고 40여 년만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보호각이 설치되었음에도 관광객들은 아무렇지 않게 마애삼존불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건하게 소원을 빌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결국 삼존불의 콧등을 비롯한 여러 곳이 심각한 훼손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따라서 2000년대 중반에는 CCTV와 경보기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마애삼존불 앞에는 비로자나불상이 2005년에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스님들이 관리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정부가 스님들은 문화재 관리에서 제외시킨 후 며칠 만에 불상을 도난당한 것입니다. 
백제 마애불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이 불상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통한 보존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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