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계획도시 사비

2022. 11. 18. 08:1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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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 한성백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 곳은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도읍으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문주왕이 암살되었고 동성왕 역시 귀족들의 세력 다툼 속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웅진이란 곳에서 백제의 왕이 살해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왕의 피살 사건과는 달리 백제의 금세공술은 최고수준에 올라왔고 백제의 백성들의 삶은 안정권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웅진시절의 무령왕의 백제는 양나라와 교류를 하며 국력을 과시하였습니다. 
‘백제는 고구려를 여러 번 격퇴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 『중국 양서 백제전』
그리고 이러한 무령왕의 뒤를 이어 성왕이 뒤를 이으니 『삼국사기』에서는 지혜와 식견이 영특하고 일에 결단성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천도계획을 천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천도 계획에 신하들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국력을 집중시켜 한성을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천도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천도에 찬성하는 신하들도 있었으니 백제의 조정의 국론은 분열되었습니다. 특히 한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하들에게 천도는 불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해씨와 진씨 세력은 천도 반대세력이었는데 이들은 선대왕의 암살사건과도 관련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천도는 당시 막 즉위한 성왕에 목숨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제 곳곳을 찾아다녔고 그 중에 간택된 곳이 오늘날의 부여 바로 사비였습니다. 
이 곳은 당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지반이 낮고 물이 차오르는 땅이었습니다. 21세기에 부어 발굴유적지를 보면 밑으로 가면 흑색깔을 띠는데 이는 저습지에 가까운 퇴적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대국가시기에는 이곳은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건물도 짓기 힘들었을 텐데 왜 이 곳을 택했을까. 성왕은 사비의 지형을 보았는데 백강이 휘감고 금강의 하류로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성왕은 해상왕국으로의 백제를 꿈꾸고 백성들을 품고자 하였으므로 기존의 도시보다는 새로운 넓은 땅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사비는 기존의 토호세력이 없어 더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성왕이 선택한 계획도시 사비

이 때 인도도 다녀온 고승 겸익은 사비로의 천도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왕에게 전달합니다. 백성들이 사비로의 천도를 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성왕은 천도에 노동력을 징발하면서 세금을 면해주고자 했지만 설득 없는 천도계획은 백성들의 원성만 샀습니다. 그러던 백제의 왕실이 주관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참석하는 제사가 있던 날 겸익 승려가 나타나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로 황금새가 웅진땅에서 날아와 사비로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눈부신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꿈 이야기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천도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사비의 습지를 극복하기 위해 흙을 파내어 물을 한 곳으로 모으니 그 곳이 바로 오늘날의 궁남지라는 저수지였습니다. 이 곳은 주변하천과 연결되어 습지대의 물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궁남지는 왕과 귀족들의 유흥지가 아니라 홍수를 대비하고 이곳에서 파낸 흙으로 도성건축에 활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한 두께로 흙을 펴서 다지고 다시 쌓아 올리는 방식인 판축공법으로 흙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양나라에 간 사신이 돌아왔는데 양나라의 도읍지 건강성을 참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쪽 외곽에 성을 쌓으니 백제는 삼국 중 최초로 나성을 건설하였습니다. 이러한 나성은 나뭇잎, 나뭇가지로 기초를 다지고 흙을 덮기를 반복하는 토목공법인 부엽공법으로 쌓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 양측 면에는 말뚝을 받아 토양의 유실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자를 건설하여 이중방어벽을 쳤습니다. 하지만 공사를 진행하던 중에 비가 많이 온다는 천문관측 기록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나성의 북쪽을 연장하여 백강의 범람을 막도록 해야 했습니다. 또한 529년에는 고구려의 안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변방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편이나 백제본기 성왕편에도 529년에 오곡성(五谷城·황해도 서흥)에서의 전투 기록이 나옵니다. 당시 안장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북변을 쳐들어왔는데, 이때 백제에서는 좌평(佐平) 연모(燕謨)가 보·기병 3만으로 고구려군과 오곡원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이 때 백제군은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전사자가 20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도성의 건설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성왕은 중앙관제를 개편합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전문화하기 위해 22부로 두어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534년에는 태풍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한 완성되지 않은 건축물이 부서지기도 했는데 이 중 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장식인 목탑의 보륜이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것은 고대에 불길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궂은 날씨가 지나간 뒤로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이쯤 되면 천도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비성 건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태풍으로 부서진 폐기와로 건물의 담을 쌓으니 와적담장이었고 와적기단이었습니다. 
또한 지쳐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비성 중앙에 정림사가 세워졌습니다. 중앙의 5층 목탑은 38m에 이르는 것이었고 가까이 다가가면 더욱 웅장하게 보였다고 하는데 하앙식구조로 건축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해 지렛대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더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건축 양식입니다.   
‘백제는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 『중국 주서』
‘성왕 16년(538년) 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삼국사기』
궁궐의 남문을 지나 국정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남궁, 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이 있는 중궁, 그리고 그 뒤에 왕족들의 생활공간인 북궁, 그리고 궁 뒤에는 부소산성이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왕궁 남쪽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졌으며 시가지는 바둑판으로 길을 냈으며 수로, 경작지도 함께 배치되었습니다. 도로는 십자형 도로로 구획되었고 남북대로는 사람과 수레가 함께 이동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 양쪽에는 배수로가 파져있으며 따라서 사비는 상하수도가 마련된 도시였습니다.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 사비성은 다섯 개의 큰 부로 나누고 항이라는 작은 구간들을 마련하였으며 도시를 직각의 도로로 나누어서 동일한 블록으로 만들었으니 당시로서는 미래형 도시였습니다. 
성왕의 계획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백강 어귀에 구드레항을 설치한 것입니다. 이 곳에 외국인들이 머무는 숙소를 설치하고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만들었습니다. 이 평저선은 배의 앞뒤로 솟아오르게 해 파도를 쉽게 넘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백제의 선박들은 일본규슈, 오키나와를 중간기항지로 하여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그리고 북인도까지 항로를 넓혔습니다. 이로 인해 웅진시대보다 대외관계가 3배로 늘었습니다. 남방에서 들어온 물건들은 구드레항에 들러 일본으로 다시 나가니 구드레항은 동아시아 중심지로서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백제에는 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 사람도 있다.’  『중국 수서』 
이렇게 건설된 사비는 말 그대로 계획신도시였습니다. 이것을 실천한 성왕은 결단력 있고 추진력있는 군주였을 것입니다. 혹시 독단적이고 고집센 왕은 아니었을까. 성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불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왕 전륜성왕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왕은 백제사에 있어서도 이상적인 군주였을 것이며 그의 결정으로 계획되고 완성된 사비성은 538년에서 660년까지 123년간 백제의 마지막 왕도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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