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땅에 핀 백제문화 아스카

2022. 11. 16. 08:1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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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지역으로 들어온 백제인들은 더 좋은 땅을 찾아 동쪽으로 향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바로 일본의 나라와 오사카 일대입니다. 나라지역은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야마토정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백제인들은 크게 활약하며 현재까지 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럼 오사카 일대에는 어떠한 백제인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을까. 일단 이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백제인들의 자취는 현재 축제로도 남아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천왕사왔소’축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사카에서는 ‘백제교’, ‘남백제 보도교’, ‘오사카 백제역’ 등 이 곳에 백제인이 와서 살았음을 현재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온 것뿐만 아니라 마을을 이루어 살며 문화를 전파하였고 그 영향이 지명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사카에는 큰 절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천왕사입니다 .이 절은 일본 최초의 관립사찰로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반대할 세력을 제거하고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절입니다. 쇼토쿠 태자와 백제계 호족인 ‘소가’씨 일가가 불교를 반대했던 모노노베씨 세력을 제거하고 불교중흥을 위해 593년 창건한 사찰로 1탑·1금당·1강당이 일직선으로 지어진 백제식으로 지어진 절입니다. 그리고 제50대 환무천황(781~806)의 생모가 백제 무녕왕(501~522)의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생모는 화(和)씨으로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환무천황도 백제인의 후손인 춘자희, 하루꼬와 결혼하였으니 하루꼬의 묘가 오사카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왕 뿐만 아니라 백제왕을 모시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백제왕신사입니다. 일본에서는 1월 1일이 큰 의미를 갖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음력이 폐지되면서 일본의 1월 1일은 명절과 신년맞이를 겸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에 신사에 들러 한 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에 백제라는 의미를 가진 쿠다라오 신사(百濟王神社)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신사의 이름에 왜 백제란 단어가 들어갔을까. 백제 부흥 운동이 실패하고 먼 이국 땅에서 백제의 부흥을 꿈꾼 이가 있으니 바로 백제왕족이자 의자왕의 아들 부여선광이었습니다. 그는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부여 풍의 아들로 전해집니다. 부여선광은 일본에 왔다가 백제가 멸망하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으로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오사카 주변에 살았고 그들은 부여선광을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이에 693년 일본조정은 쿠다라노코니키시씨 즉, 백제왕이라는 성을 하사하였으니 백제왕신사는 백제왕의 후손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고 그 주변에 백제인들이 몰려들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사의 우두천왕이라는 글씨가 씌여 있는데 이 우두천왕은 한반도에 머물러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일본 시조설화에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백제왕과 일본왕실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백제계 금동신발

그리고 백제 왕족을 기리는 신사로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를 모시는 곳인 아스카베 신사가 있습니다. 곤지왕은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인 개로왕의 동생입니다. 곤지왕은 461년 개로왕의 지시로 일본에 들어와 15년간 체류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일본에서도 왕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럼 이 곤지왕이 왜 일본에 왔을까. 그것은 당시 백제가 위기였으므로 고구려에 대항할 군대를 청하기 위해 사신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야마토 정권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동원할만한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고구려군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의 군사가 필요한데 그럴만한 항해술이 안되었으며 육로를 통해 북진하더라도 수많은 산과 소국을 거쳐야 하는 길이 너무 번잡하므로 청병사보다는 곤지왕은 이 지역에 정착한 백제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5세기 후반부터 많은 백제인들이 아스카에 들어왔는데 백제인들은 왜 아스카지방에 왔을까. 이 곳이 바로 살기 편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스카는 안숙(安宿)이라고도 표기했는데 백제인들이 건너와 편안히 잠을 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정착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사찰을 짓고 궁전과 고분을 조성하며 기와를 만들며 백제인들이 문화를 꽃피웠으니 그것이 바로아스카문화이고 이후 일본 열도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스카에서 시작된 일본불교문화의 진원지도 백제인들이 건축했으니 그것이 바로 아스카사입니다. 그리고 이 아스카를 지을 때는 고구려도 황금 300량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창건 당시 절의 주지도 주지도 백제승인 혜총과 고구려승 혜자였으며 특히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백제에서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혜총·영근·혜시 등 승려, … 사공인 태량미태(太良未太)·문가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露盤博士)인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능귀문(陵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과 화공(畵工)인 백가(白加)를 파견했다.’ 『일본서기』
일본의 기록에서는 지은 사람이 백제의 장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 발견된 와당은 백제의 절터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제양식의 아스카사를 지은 인물은 백제후손인 소가노 우마코로 이 정도의 백제장인들을 동원할 정도면 일본왕과 소가노 우마코가 엄청난 협력관계였고 백제의 지배층과도 상당히 가까운 관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불교역사서 『부상략기』에는 ‘593년 1월 아스카사 목탑 초석에 사리를 안치하는 행사를 할 때에 소가노 우마코를 필두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나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줬다’는 기록하였습니다. 이 절에는 일본황실의 외척으로 일본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 소가노의 종말의 흔적도 남아 있으니 소가노 이루카의 머리 무덤입니다. 소가노 이루카는 소가노 우마코의 후손으로 마지막 권력자이었고 다이카 개신으로 가문이 참살당하는 바람에 소가 씨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 무덤만이 아스카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스카사를 건립한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은 현재 이시부다이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돌덩이만 나와 있지만 관을 안치한 석실이 드러난 형태로 봉분은 없어진 것입니다. 특히 77톤의 돌덩이로 통해 백제세력의 권세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스카의 백제문화는 당시 일본의 복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의복은 크게 뒤처져 있었고 가죽과 천을 여민 옷을 걸쳐 몸을 가리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의복에 변화를 가져다준 것도 백제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아스카의 구레쓰히코신사로 이 곳은 백제에서 건너간 재봉 기술자 부부를 모시고 있습니다. 
 ‘손재주가 있는 자(者)인 한직, 오직과 바느질을 담당하는 자매를 데려왔다’ 『일본서기』
당시 아스카에 백제의 재봉사들이 집단 거주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들의 기술이 일본왕실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사카 부 히라가타 시 인근 나스즈쿠리(茄子作) 유적지에서 2005년5세기 때 쓰이던 베틀이 발견됐는데 실 자국까지 선명한 백제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제인들은 일본의 주거문화도 바꾸어 놓았는데 이전까지의 움집형태의 집에서 벗어나 도랑을 파고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운 뒤 기둥 사이를 흙벽으로 메우고 지붕을 얹은 집에서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집이 나라 현의 가시하라 시에서 발견되고 충남 공주에서도 발견되니 일본에서 발견된 주택에 대해 백제식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와 고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는 말이 있을까.  ‘도왜인((渡倭人)’ 또는 ‘도래인(渡來人)으로  즉 일본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들이 야마토 정권의 수립과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삼국과 중국 중 백제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아스카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인들의 활약으로 만들어낸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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