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은 왜 일본에 마을을 만들었을까.

2022. 11. 15. 08:0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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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습니다. 고구려도 이후 망했지만 고구려유민들이 고구려가 망한 자리에 나라를 세우니 그것은 바로 발해였습니다. 백제도 역시 이러한 자신들만의 나라건설을 꿈꾼 건 아니었을까요. 백제는 그것을 자신들이 예로부터 문화를 전수해준 곳으로 터전을 옮기어 실현해 나갑니다. 그곳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간에 교류는 오래전부터 잇어왔습니다. 이다즈케 유적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일본최초의 농경문화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한반도의 농경문화와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기원전부터 한반도인들이 농경문화를 가지고 온 곳으로 한국의 울산 금단리, 부여 송국리 선사유적과 관련되어 지는 곳입니다. 이 외에도 요소노가리라는 유적지는 한반도의 청동기와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야요이 시대의 주거지로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유물인 옹관묘와 함께 묻은 청동창과 청동검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유적에 따라 한반도와 관련된 곳은 일본의 규슈이고 이곳에 백제인들이 자리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에는 다자이후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 곳 다자이후(太宰府; 태재부)는 고대 일본에서 조정의 사무를 일부 분담할 목적으로 설치한 지방행정기관 겸 특수행정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하게 되자 일본은 백제의 부흥을 돕고자 했지만 백강전투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의 유민들이 바다를 건너와 살게 되었는데 일본은 나당연합군에 패배한 후 이들이 다시 바다로 건너와 침략할까 두려워 본래 해안 근처에 있던 다자이후도 내륙 쪽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옮겨진 다자이후에 백제유민들이 몰려와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에서 쌓았던 것처럼 이 지역에 백제성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 안에 곡식창고와 우물도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 즉 7세기 후반에 쌓은 일본의 성들은 대부분 백제 망명 귀족들에 의해 쌓은 것이며 현재에도 ‘조선식 산성’으로 볼리고 있습니다. 왜는 신라를 두려워하여 산성을 쌓았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이러한 왜를 두려워하며 죽어서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신라는 일본의 군사력과 비등하다고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백제계 귀족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는 백제인이 쌓았다는 증거로 연꽃무늬와당이 춭토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성태자는 일본에 건너와 오우치 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공로였습니다. 
‘일본 대내전 오우치씨는 자칭 백제 온조왕의 후손이라 한다.’ 『세종실록』
  일본에 백제의 철기 제련 기술과 선진 문물을 전파하여 문화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생각되는 오우치 기문은 연방왕국의 세력자로 떨치며 고려와 조선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야마구치현에 있는 구다라베 마을이 있는데 구다라베는 백제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아주 먼 옛날에 백제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혹시 이것이 오우치 가문이 이 지역을 다스려서 그런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편 반야씨라는 백제여인은 백제에서 건너와 천황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남편이 나중에 천황이 됩니다. 이 반야여인은 성왕의 딸이거나 좌평의 딸로 생각되고 있는데 먼저 나라로 떠난 남편을 찾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뱃사람들을 구하게 위해 반야여인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야의 명복을 위해 만든 절이 반아사라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한편 가카라시마라는 섬에는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오비야동굴이 있습니다. 무령왕의 부모가 일본으로 가던 중 산기가 있어 섬에서 배를 정박시키고 한 동굴에서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무령왕이고 장소는 오비야 동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령왕은 사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섬이라는 뜻을 지닌 시마라는 단어와 통하는 것으로 사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큐슈 지역에는 백제계열의 토기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삼족토기와 중앙에 구멍이 뚫린 항아리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백제 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에 비해 매우 다양한 종류가 있고 장식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유려한 선과 색조를 나타내어 백제인들이 절제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 토기들은 무덤무장용보다는 일상생활용들이 많아 실용적인 면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백제 일부 지배층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많은 백제인들이 이곳에 많이 몰려와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나아먀 고분, 이 무덤은 전방후원분으로 앞은 마름모꼴이고 뒤는 동그란 모양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최고수준의 금동세공기술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유물이 한반도에서 출토되었으니 전북 익산시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의 고분에서 같은 모양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럼 거리가 먼 백제와 일본의 한 지역에서 같은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을까. 이는 두 지역의 같은 문화를 공유했거나 어느 한 지역이 다른 한 지역에 문화적으로 종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마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백제가 담로를 파견하였고 그 지역 중에 일본의 한 지역도 포함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구마모토현 사카모토촌은 백제라는 지명이 들어간 단어간 단어가 있으니 백제마을이라는 의미인 구다라기 마을, 백제래촌 역장, 백제래 우체국, 백제래스포츠센터, 백제래 서초등학교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결국 이 곳에 많은 백제인들이 와 살았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 <백제사(百濟寺)>라는 사찰만도 다섯 군데나 됩니다. 큐슈의 쿠마모토현(熊本縣)에 한 군데가 있고 오사카부(大阪府) 내에 두 군데, 나라현에 한 군데, 큰 호수로 유명한 시가현(滋賀縣) 산중턱에 또 한 곳이 있습니다. 고대 일본에는 이렇게 백제의 숨결이 살아 있었습니다. 

백제왕 신사

한편 백제 정가왕은 백제의 패망을 피해 일본 나라로 왔다가 일본에서 정권투쟁이 벌어지자 정가왕은 난고손(南鄕村)에, 장남 복지왕은 90km 떨어진 히키(比木)에 정착합니다. 가왕 일행은 반란군의 추격에 반격하여 정가왕은 난고손에서 왜 호족 7개 가문의 지원을 받아 전투를 벌이지만 화살을 맞아 목숨을 잃고 이후 달려온 아들 복지왕이 반란군을 제압합니다. 이들이 머물던 마을에서는 각각 정가왕을 신으로 모시는 미카도(神門) 신사와 복지왕을 신으로 모시는 히키 신사를 세우고 정가왕의 시신은 마을 입구에 묻었습니다. 기록 대신 이들의 무덤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을 모시던 시녀 등 12명이 시신을 둘러싸고 자결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주민들은 왜 정가왕을 신으로 모시게 되었을까. 당시 바다를 건너온 백제인들은 의학, 농업, 문화에 있어서 그 경지가 높았으므로 당시 마을사람들은 이들을 동경했으므로 보다 선진적인 문명을 지닌 백제인을 신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럼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은 어떠한 경로로 일본으로 왔을까. 지금으로부터 1만여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국 대만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하나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대가 바다가 되었고 그러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생기고 서해, 남해, 동해가 생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규슈였고 이곳을 가기 전에 쓰시마 섬을 경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쓰시마섬이 보이고 일본의 가라쓰에서도 이 쓰시마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백제인을 포함한 한반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정처없이 항해를 해 일본으로 간 것이 아니라 쓰시마라는 곳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또한 당시 해류의 흐름을 교통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백제 무령왕의 탄생지로도 알려진 가라쓰해변에는 현재에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생수병이나 라면 봉지같은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백제 부흥운동에 실패한 백제인들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일본에 들어와 일본 속에 또다른 리틀 백제를 건설하여 현재에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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