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에게 삼천궁녀가 있었을까
2022. 7. 23. 21: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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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왕은 의자왕입니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의자왕은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한 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삼천궁녀 그리고 낙화암이 있기 때문입니다. 낙화암과 삼천궁녀는 백제의 마지막 왕에게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우기에 충분했으며 망국의 왕의 대명사로 의자왕이 우리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하였을 때 어떤 식으로는 영향을 미쳤을 인물입니다. 의자왕이 정치를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란 것은 오해란 것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과연 삼천궁녀가 백제에 존재했을까입니다. 아마 어린 친구들에게는 백제의 의자왕에게는 삼천궁녀가 있었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고 의자왕에게 삼천 명의 여자가 있었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 생각하면 과연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백제의 왕궁 안에 살았을까 의문을 품으면 그것이 해결되는 데에 오래걸리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자왕에 대한 백제 멸망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삼천궁녀에 대한 사실을 짚어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럼 삼천궁녀는 어디서 등장하는 말일까요. 삼천궁녀란 이야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흔이 쓴 문집 『안락당집』에 실은 낙화암 칠언고시에 처음 등장한다고 합니다. 문집에 쓰인 삼천궁녀는 수사적 표현이 아닌 문학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근거가 배제된 표현이라는 것이죠. 결정적으로 김흔이 쓴 문집을 제외하면 그 이전의 어떤 역사서에도 삼천궁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자신의 서자 41명을 좌평에 봉했다고 합니다. 서자는 후궁과 궁녀의 소생이고 여기에 공주들도 더한다면 100여 명에 가까운 자식을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의자왕은 꽤나 많은 궁녀들을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삼천은 물론이거니와 백 명까지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가구 숫자는 76만 호(戶)라고 하는데요. 한 호당 넉넉하게 잡아 6명이라 하더라도 백제의 인구는 500만이 넘지 않으며 아마 숫자의 절반 수준이 백제의 실제 인구 와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럼 약 350만 명 중에 삼 천 명의 젊은 여성들을 궁녀로 백제왕궁에 들인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럼 궁녀 수에 관련하여 비교적 정확한 기록을 남긴 조선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태종 때에는 수십명, 그리고 15세기 초중반에는 '100명 미만', 성종 때인 15세기 후반에는 '최소 105명', 인조 때인 17세기 초중반에는 230명인데요. 성호의 『이익사설』에서는 당시 영조의 궁녀는 684명이라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백제보다 후대의 나라이고 인구도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영조 때의 조선의 인구수는 1600만 명에서 18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들 중 684명의 궁녀를 뽑았다면 백제의 인구를 350만 명으로 놓고 얼추 계산하면 아마 200명에도 못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삼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고 못믿게하는 것은 바로 낙화암이라는 장소입니다. 적군의 칼에 죽기가 실어 3000여 명의 궁녀들이 뛰어내렸다면 아마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하루종일 뛰어내린다면 다 뛰어내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사비성의 인구는 5만명으로 전하고 있는 사서도 있습니다. 삼천궁녀는 아에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삼천궁녀라는 문학적 표현이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을 수식하더니 조선시대의 유교적 지식을 가진 선비들과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덮어씌어지고 이후 소설과 노래로 삼천궁녀가 알려지며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삼천궁녀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중기의 문신은 의자왕을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쳐버리게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고 은유적인 비유로 삼천궁녀를 지어냈을 것입니다. 여기서 삼천은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생활하면서 이런 표현을 자주 쓰는데요. ‘내가 너에게 수천번 이야기했잖아.’, 혹은 ‘수십 번 강조해도 모르겠니.’라고 했을 때 정확한 숫자의 의미가 아닌 그만큼 많음을 의미입니다.
“백제의 군신들이 사치를 일삼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괴(災怪)가 빈번히 나타났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泗沘河)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발이었다.”
“들 사슴과 같은 웬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며, 서울에 있는 뭇 개가 노상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곡을 하더니 얼마 뒤에 곧 흩어졌다” 『삼국사기』
이렇게 『삼국사기』는 백제의 멸망 전에 있었던 모습을 기술하며 마치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역사가 어차피 승리자의 기록이기는 하나 적어도 당시 백제가 평안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삼국사기』는 백제의 멸망 전조를 전하면서도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백제에 대한 기록에 대해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고구려에 비해 백제가 멸망하기 전 안좋은 징후를 많이 기록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후대에 사람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읽는다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백제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인 것입니다. 국왕의 방탕한 생활, 기이한 자연현상, 그리고 망조를 예감케 하는 동물의 행동 등 무엇하나 좋게 해석할 수 없는 문장들입니다. 김부식은 신라를 계승한 인물이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백제에 대해 변호해 줄 당시 관료나 지배층이 없었고 『삼국사기』란 책에 백제의 멸망 전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교적 많이 서술되는 데에 막을 방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저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기술된 내용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있지도 않은 일들이 괴담처럼 떠돌았고 이것이 백제의 민간에 퍼져 불안케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신라가 백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백제가 멸망하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나당연합군에게 백제의 군주가 항복했더라도 백제의 백성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저항의 강도가 강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신라의 지배층은 당시 백제의 유민운동이 계속 부흥운동이 일으킬 것을 염려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지어내어 민간에 퍼뜨리고 그리하여 백제의 유민들이 큰일을 도모할 일을 미리 방지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백제가 멸망한 시기를 66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인 항복을 받아낸 시점으로 본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백제는 사비와 웅진 등 일부만 점령당했고 여전히 백제의 잔존세력이 건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백제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었고 신라나 당나라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복신과 도침이 백제의 부흥우동을 이끈 점이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을 백제의 왕으로 옹립했다는 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백제가 멸망하던 날, 궁녀가 백마강에 투신자살한 사실을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부여를 돌아보며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라는 시를 쓰고 고려후기 문신인 이존오는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라는 구절을 남겼으니 이미 고려시대에 낙화암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실존하는 지명, 그리고 문학적 표현이 만나 만들어낸 삼천궁녀는 백제의 패망의 원인을 의자왕의 향락과 사치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정의 실현을 위해 나당연합군에 백제를 정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야말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무시한 역사소설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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