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최고 걸작 백제금동대향로

2022. 7. 20. 21:2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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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 대향로

향이란 것은 인류가 일찍부터 사용한 것으로 고온다습한 기후인 인도에서 향이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향을 사용하는 방법 중에 향을 불사르는 방법이 있고 그에 따라 향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으니 그것이 바로 향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향로가 옛 낙랑지역에서도 발견되었으니 꽤 오래전부터 향로는 조상들의 일상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도 불교에서 보살에게 향을 공양할 때 향로가 쓰이므로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향로의 제작과 사용이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삼국시대 후반쯤이면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던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주차장을 건설하는 중에 450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유물들은 칠기로 만들어진 장방형 목곽수조안 바닥 진흙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공기가 거의 통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어 거의 원형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있었습니다. 1m 50cm 땅 속에서 숨죽은 채 15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백제 금동대향로는 높이 61.8cm, 무게 11.8kg, 최대지름 19cm로 오랜 세월을 뚫고 햇빛을 받았을 때 상부층의 12개의 구멍으로 오래 간만에 숨을 내쉬며 그 자신의 위용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을 그 모양새는 어느새 백제 최고의 걸작품으로 현대인들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백제금동대향로,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데요.
일단 외적인 것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금동대향로의 맨 위에는 봉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봉황의 입에는 여의주가 있습니다. 날개를 활짝 핀 모습이 작지만 쉽게 넘볼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밑에는 달걀모양의 형태에 각종 무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위 아래로 긴 모양은 마치 지구의 적도를 가르듯 띠를 두르고 있으며 위아래로 다른 무늬가 있습니다. 위에는 산과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표현되어 있고 사냥하는 사람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그리고 신선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며 이 외에도 동물들이 자리하는데 호랑이, 사슴, 학,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악어 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연꽃이 있는데 마치 지상의 모습을 받치고 있는 듯이 감싸고 있으며 연꽃 위에는 물고기, 새, 날개달린 물고기 같은 상상 속의 동물들과 2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마치 회오리가 공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용의 몸이며 용은 다시 이 향로의 몸체를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아래 부분은 용의 다리와 꼬리라 둥글게 표현하여 작품에 안정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신선계, 인간계, 저승계를 품고 있는 금동대향로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은 명작이라 불릴 만합니다. 특히 금동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역대급이라 말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갑니다. 금동대향로는 산봉우리와 신선의 표현에서 도교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몸체 아래를 연꽃으로 표현한 것은 불교적인 색체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표현에는 다양한 해석이 달리고 있지만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것이라는 되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금동대향로의 가치는 아름다운 외향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금동대향로는 구리와 주석을 81.5:14.3의 함량으로 합금한 청동 위에 금을 10㎛ 두께로 균일하게 입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금도금층은 금이 60, 구리가 40 정도이며 수은을 금과 섞어 모양을 만들고 가열한 다음 수은을 증발시켜 금만 남겨 제작한 것으로 지금의 기술로는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러한 도금법을 금-구리 아말감 도금법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도금방법으로는 금만을 사용한 금아말감이나 금-은아말감 기법이 있다고 하는데 백제의 다른 지역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금동향로에서도 금-구리 아말감 도금법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러한 도금법은 백제에서만 제작된 독창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용접된 부분이 네 부분만 보이고 있어 더욱 놀라움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이 금동대향로는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 근처에서 ‘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이 나왔습니다. 사리감이 창왕(위덕왕·재위 554~598) 때인 567년 창왕 누이의 발원으로 봉안됐다라고 알리고 있는데요, 아마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자리에 있던 절은 창왕이 자신의 아버지 성왕을 위해 세웠고 아마 백제금동대향로도 그 즈음에 제작된 것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학자들은 금동대향로가 땅 속에 급하게 묻힌 것으로 보았습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그 때 숨겨진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백제 성왕은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도약을 꿈꾸던 백제의 옆나라 신라를 이끈 왕은 진흥왕이었습니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밀어올리고 한강을 되찾았으나 그로부터 2년 뒤인 553년, 신라가 동북변경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하면서 555년에는 북한산에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습니다. 놀란 성왕은 영토를 빼앗긴 553년에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이는 믿었던 신라가 자신의 뒤통수를 친 것처럼 자신도 진흥왕을 사위로 맞아 안심시킨 다음 신라를 치려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성왕은 신라를 공격했으니 말입니다. 성왕의 신하들은 전쟁을 반대했지만 태자 부여창이 대군을 이끌고 충북 옥천의 관산성으로 향합니다. 승기는 처음에 백제 쪽에 있었으나 신라의 지원군이 더해지면서 태자 창이 난관이 부딪히게 됩니다. 이에 백제 성왕이 50여명의 기보병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으나 신라는 김무력이 지원하면서 백제는 왕을 포함한 좌평 4명, 그리고 3만 명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에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쓴 태자 창의 무리한 출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 가까스로 도망친 창이 554년 7월 왕위에 올라 598년 12월까지 무려 44년 5개월간이나 재위를 지켰고 그 기간 동안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안정을 도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일으킨 전투로 부왕을 사망케 했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에 추모사업을 벌였을 것이며 이를 위해  백제금동대향로가 쓰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에 조각된 코끼리를 타는 사람. 먼 동남아시아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들을 정확하게 조각해놓아 백제가 당시 해양 교류가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백제금동대향로에 주목할 만한 것은 코끼리나 악어, 낙타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물은 한반도에 살지 않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금동대향로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라에도 소그드인을 조각한 토우가 발견될 정도라면 백제가 여러 나라와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해당 동물을 보았을 수도 있고 제 3자의 말을 듣고 향로에 표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외국에서 제작되어 백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금구리아말감 도금법이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금동향로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더 커보입니다. 다소 지나친 가정을 하자면 어쩌면 백제의 영토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고 그 백제의 지배 아래 코끼리나 낙타가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코끼리를 탄 인물이나 악어 등은 고구려 고분벽화나 중국의 남북조에서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중국한나라 박산향로를 바탕으로 했지만 이미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의 그것을 뛰어넘어 백제인의 예술성과 독창성이 극대화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견 당시 백제 금동 대향로의 모습

사실 재밌는 것은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굴될 당시 2개월의 발굴허가기간이 있었고 발굴허가기간이 10여일이 남은 상황에서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면 이 곳은 주차장이나 공원으로 개발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조상의 숨결이 배인 작품들이 땅 속에서 잠자기만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조급한 마음에 철야작업을 하는 발굴단에 의해 ‘왜 나, 이제야 깨운 거야.’하듯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는데요. 발굴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수많은 백제금동대향로같은 작품들이 땅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주차장이나 아파트 단지, 혹은 각종 상업시설 밑에 깔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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