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그 진실은

2022. 7. 5. 16:4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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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

국경을 초월한 사랑, 옛날에도 있었을 이러한 사랑은 설화로서 그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부여의 남쪽 어느 마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커다란 용이 나타났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자는 방에 들어와 입에 물고 있던 커다란 여의주를 뱉어놓았습니다. 여인은 놀랐지만 침착하게 그 여의주를 받아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 여인은 용과 사랑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열 달 후 사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서동이라 하는데 마를 파는 아이라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매우 똑똑하고 용감한 서동은 어려운 살림에도 마음씨가 착해 늘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 아름답고 지혜롭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직접 신라로 찾아갔지만 서동은 백제 사람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사람인데다가 신분도 다르니 결혼하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동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동은 아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노래 하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화공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시집을 가서 
맛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대요.‘ 

‘선화공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시집을 가서 맛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대요.‘ 이 노래가 신라로 퍼져 선화공주는 쫓겨나게 되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선화공주님이 서동과 몰래 사랑한다는 내용의 노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향가인 서동요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얼레리 꼴레리 선화공주랑 서동이랑 사귄대요. 사귄대요~~.’ 하는 둘의 사랑을 놀리는 노래인데 이 노래가 신라 전체로 퍼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결국 신라 궁궐까지 전해졌습니다. 공주의 스캔들에 화가 난 진평왕은 공주를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졸지에 딸을 멀리 보내게 된 선화공주의 어머니는 슬퍼하면서 금덩어리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헛소문이 사라지면 다시 부를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귀양 가게 된 선화공주 앞에 사나이 하나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사나이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공주와 동행하였습니다 선화공주는 그 사나이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공주는 그 사나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미래를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나이는 자신이 서동임을 밝히고 자신이 한 행동도 고백했습니다. 선화공주는 기뻐하며 노래의 내용이 맞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백제로 건너갑니다. 서동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선화공주는 서동의 가난한 살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화공주는 어머니에게 받은 황금을 서동에게 보이며 이것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서동은 선화공주가 내어놓은 것이 황금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자신이 마를 캐는 산에 이러한 황금이 널려 있다고 말합니다. 서동은 선화공주를 산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 산에는 서동이 말한 대로 황금이 널려 있었습니다. 선화공주와 서동은 이 황금들은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왕의 사위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많은 황금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화공주와 서동은 신통력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공주는 황금과 함께 편지를 법사에게 맡겼고 법사는 자신의 신통력으로 신라궁궐로 황금과 편지는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진평왕을 감탄하게 만들었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동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어 그 덕으로 백제왕에 오르니 그가 바로 무왕입니다. 

이 설화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러면 서동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삼국사기에서는 서동의 아버지가 법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법왕이 잠저 시절 익산에 들렀는데 신분이 미천한 여인과 관계를 하여 낳은 아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동은 노래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데요. 그리하여 이 노래가 예언가가 됩니다. 서동은 이것을 미리 계획을 하고 부르게 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이 노래에는 마지막 구절이 특히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夜矣卯乙抱遣去如" 특히 ‘卯’에 주목하는데요. 본래 토끼를 의미하는데 삼국유사의 고판본을 보면 ‘卯’이 아닌 邜'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교수는 ‘卯’를 묘로 읽되 고구마와 비슷한 마를 의미한다고 해석했고 그러면 ‘선화공주가 밤에 마를 안고 간다.’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는 '邜'자로 보고 본래 글자는 '卵(알 란)'이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마 남자의 불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선화공주가 밤에 불알을  만지고 잔다.'로도 해석이 가능하였을 텐데 마를 만지고 자는 것보단 불알을 만지고 잔다는 쪽이 당시로서는 큰 논란이 되지 않을까요. 
이 설화로 당시 정세를 이해하면 백제와 신라는 결혼동맹을 맺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는 반대입니다. 무왕은 줄곧 신라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설화 속 이야기를 보면 서동은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에서는 용의 아들로 표현했으므로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왕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진 역사서 『북사』에서는 무왕을 백제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기록을 믿기에는 서동이 마를 캐고 살았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힘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왕의 왕후가 사택적택의 따님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전하는 내용으로 선화공주로 묘사되는 백제 왕후는 아마 엄청난 재력가의 자손이었을 것입니다. 백제 무왕 이전의 혜왕과 법왕은 재위기간이 1년 남짓으로 불안했습니다. 무왕은 마를 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왕위계승이 밀리는 왕족이었지만 유력 가문인 사택 씨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고 이에 따라 귀족들은 허수아비왕으로 서동을 왕위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적통이 아니었기에 무왕은 이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왕은 신라를 공격하면서 신라 진평왕의 공주를 후궁으로 달라는 요구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보완하고 사택 가문으로 대표되는 백제귀족세력을 견제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화 속 선화공주는 사택가문의 딸인 왕후와 신라공주가 겹쳐진 인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무왕은 안으로는 사비성을 호화롭게 짓는다든가 왕궁 남쪽에 인공연못을 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 팠다는 인공연못은 아마 궁남지일 꺼라 추정됩니다. 
"3월에 궁 남쪽에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 20여 리 지점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네 변에는 버드나무류를 심었고 연못 가운데는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했다."
"봄 3월에 왕이 비빈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큰 연못에서 놀았다."
무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궁남지는 무왕의 탄생설화를 품은 곳이기도 합니다. 연못 한가운데 있는 포룡정이 그 증거입니다. 포룡이라는 이름은 용과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연못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금성산에서 뻗어내려오는 영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야 한가운데 못을 팠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제시대 이후 그 크기가 3분의 1로 줄었다고 합니다. 본래 3만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연못이었을 것이라 이야기입니다. 이 연못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대대로 마래방죽이라고 불렀습니다. 마래는 마애로 마애는 마아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서동을 일컫는 것입니다. 지금은 연꽃과 야생화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백제 사적지가 되었지만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조경예술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풍광을 지닌 궁남지는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지어졌다고 전합니다. 반면 이 연못을 짓기 위해 동원된 백성들의 땀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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