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요서에 진출했을까.

2022. 6. 23. 21:3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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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요서에 진출했을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백제의 전성기를 접하고 나면 백제가 해외진출을 하였다면서 요서로 화살표가 표시된 지도를 접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요. 
“근구수왕이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진나라를 정벌, 오늘날의 요서, 산동, 강소, 잘강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 『조선상고사』-신채호-
“문헌통고에 의하면 ‘당시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고 한다.”『동국문헌비고』
“당시 백제가 점령한 곳은 당나라 때의 유성과 북평 사이의 지역이었다.””『문헌통고』(1391년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백과전서)

양직공도


일제 강점기 시대의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물론 중국의 문헌에서는 백제가 현재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다는 기사를 보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가 자기네 나라의 영토 일부를 기록한 중국 측의 자료는 의미심장한데요. 이 『송서』라는 책은 중국 내에서 신뢰가 두터운 역사서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해외진출에 무게가 실립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백제의 요서진출과 관련하여 눈여겨볼만한 자료가 중국에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6세기 남조 시대 양나라를 찾은 사신과 나라들을 묘사한 양직공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백제국사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 옆의 글에서는 백제를 낙랑으로 표현하며 “진나라 말기에 구려(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낙랑이 또한 요서의 진평현을 차지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선비, 우문부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인데... 지금 그 수가 십여 만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서기 345년” 『진서』
4세기 어느 시점에 백제인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바다로 건너가 이들은 잡아와 포로로 삼았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당시 요서지역에 상당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럼 요서는 어디일까. 고구려가 팽창함에 따라 군현도 옮겨 다니게 되는데 그에 따라 요동도 서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이 바로 요서가 됩니다. 그러니까 글자 표현대로 요하의 서쪽이 요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고구려가 차지한 서쪽 끝이 요동이었고 백제인이 요서로 진출했다고 했을 당시에는 지금의 난하 근처를 요서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요서지방에 활동한 백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인물이 있을까. 나라가 망하게 되면 더러는 해당 왕조의 후손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연의 공격으로 346년에 망한 부여도 마찬가지였으며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인물 중에  부여계 왕족 출신인 여암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읍에서 북쪽 유주까지 달려 올라가 주민 천여 가구를 탈취하여 가서 마침내 영지에 거점을 잡았다.”
그럼 당시 여암의 반란은 그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을까. 여암의 행적에는 백제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백제왕들의 이름을 보면 전지왕은 여영, 비유왕은 여비, 진사왕은 여휘, 근초고왕은 여구로 기록합니다. 백제 왕실은 부여의 왕실과 마찬가지로 여씨를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백제 왕실이 바로 부여의 후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왕 때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꾼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이 5호 16국으로 분열했을 당시 백제는 이들 국가 중 동진과 긴밀한 협력국가를 맺었습니다. 당시 백제는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그들로부터 수입한 문물을 지방세력과 일본 열도 세력에게 나누어주면서 통치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313년 이후에 고구려 미천왕이 한반도 중부에 있던 낙랑과 대방을 정복하고 전연에게 낙랑공이란 작위를 받을 때 백제는 전연과 대립관계에 있던 동진에게 낙랑태수라는 작위를 받습니다. 낙랑태수라는 것은 낙랑이라는 지역을 당신이 다스린다는 것을 확인시킨 것으로 백제는 이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한 것입니다. 이렇듯 백제에게 동진은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던 중 4세기 후반에는 동진이 북벌을 단행하는데 이 때 동진은 여러 북방민족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고 백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백제는 어떻게 도와주었을까. 바로 같은 혈통이자 부여계 왕족인 여암을 활용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연의 장군 여암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무읍에서 유주까지 달려갔다는 기록이 중국 측 기록에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백 개의 가문들이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국호를 백제라 했다.”『수서』
처음 국호의 이름은 십제였는데 이후 백제로 바뀌었습니다. 이 때 제(濟)는 나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백제는 해양왕국으로서 바닷길을 통해 요서로 진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나 신라, 가야도 백제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남조와 통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제 입장에서는 바다 자체가 영토였고 이를 통해 무난히 요서로 갔을 것입니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 서쪽으로는 월주, 남쪽으로는 왜,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경계로 하는데 모두 바다를 건너 이른다. 그 동쪽은 신라이다.” 『신당서』
신당서의 기록을 따르면 백제의 영토는 당시 중국의 월주,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 그리고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고 전하며 동쪽으로는 신라가 있다고 밝힌 기사로 『구당서』에도 비슷한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고구려도 바다를 건너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요동과 맞댄 국경은 바로 요서일 것입니다. 그럼 이 사료로 그려보는 백제의 영토는 어떠할까요. 아마 서해를 백제의 지중해로 품고 있는 왕국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집니다. 이를 토대로 백제인의 활동영역을 보면 그해상왕국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럼 이러한 요서 지방에 형성된 백제세력은 언제까지 유지되었을까요. 
“그 옛 땅은 신라에 빼앗기고 성 근처의 남은 무리는 점점 흩어져 돌궐과 말갈에 복속되었다. 그 왕 부여숭은 감히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영토를 신라말갈에게 빼앗겨 부여씨의 군장은 마침내 끝났다.” 『통전』
백제가 멸망당하고 나서 그 땅이 신라와 말갈에게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말갈에 넘어간 백제의 땅은 어디었을까. 
“그 손자 경(의자왕의 손자)은 ……그 땅을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었다. …”
바로 발해말갈입니다. 따라서 최소한 백제 멸망 직전까지 요서지방에 상당수 백제인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에 대한 통치왕조가 바뀌더라도 백제인들은 계속 거주하며 백제의 상업적인 거점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백제는 중국 요서에 진출했는가?


누군가는 삼국사기에 백제의 요서진출을 증명할만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요서라고 할만한 지역에서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백제의 요서진출설에 대해 불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백제의 진출을 기록했던 중국 측의 기록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첫 번째 일식기록은 기원전 54년인데 현대과학으로 분석한 결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일식기록이 나와 있는데요. 이를 토대로 최적관측지를 분석한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내의 백제가 아닌 여기에서 설명한 요서 지방이 최적의 지역으로 나왔습니다. 삼국사기에 관련기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불신한다면 이는 삼국사기의 일식기록도 부정하여야 하므로 백제불신론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영토가 되었든 영향력이 되었든 짧은 시간이든 간에 어떤 식으로는 그 곳에 백제인이 살고 있어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지 않을까요. 지나친 신중론이 오히려 올바른 역사를 바라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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